느지막한 볕이 누이의 속눈썹 사이를 파고들었다. 누이는 꿈결로부터 눈을 떴다.



 뻑뻑하고 따가운 시야 사이에 가장 먼저 든 것은 훤히 방 안을 채운 물결 같은 볕이었다. 출렁거리는 빛의 잔영을 찬찬히 훑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가, 금세 손을 내리곤 다시 부스스 번지는 망울로 눈동자를 옮겼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빛이었다. 다만 조금 안락한 색깔을 띠었다. 잠기운이 한 김 가실 때까지 그렇게 하얀 벽을 반으로 가른 경계선만 쫓으며 누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수면 위로 기포가 떠오르듯 가만 터지는 조그마한 떠오름이 있었다. 별 건 아니었고 이제서야 봄이라는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옷의 두께가 얇아진지는 몇 주나 되었는데 기온과 체온의 간극이 너무 길어 스스로가 둔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부정할 수 없이 봄이었다. 벚꽃은 한참 전에 떨어졌고 벚꽃 그 다음의 꽃들이 핀다. 무슨 꽃들인지 대부분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그 꽃들이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꽃은 활짝도 핀다. 아마 문 열고 내려가면 새삼스럽게 눈이 아파올 정도의 꽃들이 피어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심히 지나쳤던 한 철의 것들. 꿈 같은 색들.


 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요즘 꿈결에서 헤어나는 일이 이상하게도 어려웠다. 잠이 모자란 것 같았다.


 빛을 가로지른 한 가운데 서서 균형을 잡고 느리게 욕실로 걸었다. 미지근한 물을 얼굴에 끼얹어 세수를 하고 물이 튀어 젖은 머리카락을 젖은 손으로 대충 그러모아 묶었다. 그제서야 눈꺼풀이 한층 가벼워져 깜빡이는 감각이 옅어졌다. 오늘은 딱히 정해진 할 일이 없었다. 요즘 대부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한순간 늦잠이나 더 잘 걸, 부질 없는 후회가 바람처럼 스쳤다. 그렇지만 이미 방 밖으로 달아난 잠이 되돌아올 리 없다. 누이는 어질러진 침대 한가운데에 걸터 앉아 막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이 벽에 그려진 빛의 수평선이나 보고 있었다. 조금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아, 그 꽃들, 지기 전에 보러 가야 하는 걸까.


 꿈결에서 다 헤어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달아난 줄 알았던 잠이 슬금슬금 볕을 타고 다시 기어들어왔거나. 어딘가 묘하게 색조가 맞지 않는 스펙트럼을 떠올리곤 그 위에 꽃잎 모양을 대강 덧씌워 보았다. 밖으로 나가서 구경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예쁜가, 아닌가. 잘 모르겠다. 꽃의 예쁨을 좋아하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알 수 없었다. 다시 나가서 그 보드라운 것들을 눈앞에 대고 들여다보면 기억이 날까? 이것도, 잘 모르겠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한다고 해도 무어라 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아무도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꿈결에 조금 더 푹 잠겨 있기로 했다. 이제까지 빛 속에서 푹 젖어 있던 것처럼.

 언젠가는 여름 볕에 말릴 날이 오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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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어



 ……그러니까, 길을.

 버스에서 내내 서 있다가, 도착하기 겨우 두 정거장 전에 잠시 앉았을 뿐인데 그새 곯아떨어졌다. 이봐, 학생. 여기 종점이야. 그것도 버스 기사가 깨워야 할 정도로 아주 깊이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고도 정신은 안 돌아와서 한참이나 좌석에 앉아 그저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옆에선 버스 기사가 많이 피곤했나보다고 혀를 찼다. 결국은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는 느릿느릿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훅 불어닥친다. 옷자락을 끌어모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서서, 주변을 천천히 빙 둘러보았다. 해는 잠들기 전에 이미 져 있었고, 오래된 가로등 몇 개가 인도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일단 앉고 싶어서 정류장에 털썩 주저앉고, 문득 버스 노선도를 봤다.

 처음 듣는 정류장인데. 그러고 보니 여기 종점이라고 했었나……

 아파트 몇 채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듯한, 땅 위의 섬처럼 생긴 곳이었다. 아파트가 없는 곳은 전부 산, 혹은 도로였다. 이런 곳에 아파트가 있는 게 더 이상해…… 여기서는 마트 어떻게 가지. 별 시덥잖은 생각이 들었다. 노선도를 다시 들여다보며 집에서 몇 정거장이나 더 왔는지 세다가, 열 정거장이 넘어가자 그냥 때려쳤다. 어차피 똑같이 시덥잖은 짓이었다. 결론은 하나니까.

 길 잃어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자명한 사실이었는데 막상 머릿속에 문장으로 떠오르니 덜컥 짜증이 치솟았다. 아니면 찬 공기에 정신이 어느샌가 맑아져서 짜증 부릴 정신머리라도 돌아왔든지. 머리를 한바탕 헤집고는 괜히 노선도를 노려봤다. 난생 처음 와본 정류장 이름이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그깟 두 정거장 얼마나 남았다고 그 사이에 앉아서는 처잔 건지.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오늘 처음 쳐보는 피아노로 처음 합주 맞춰보다가 악보 집어던지고 건반에 머리 박을 뻔 했는데 이번엔 처음 와보는 종점에 앉아 있다.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속으로 들끓는 짜증을 풀 곳도 없어 고개만 푹 숙였다.

 집에 가고 싶다.

 딱 봐도 택시가 원하는 때에 올 것 같은 곳은 아니었다. 평소엔 돈 아까워서 그냥 택시도 콜택시도 안 타지만 지금은 돈이고 나발이고 집에나 가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리나, 설마 20분은 아니겠지. 일단은 핸드폰부터 꺼내보는데,

 잔여 배터리 3퍼센트. 충전이 필요합니다.

 "씨발……."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3퍼센트 남은 배터리는 인터넷 접속하자마자 매정하게 2퍼센트로 변하더니 전화를 걸려는 순간 꺼져버렸다. 까맣게 변한 화면을 보다가 문득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도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씨발…… 화면에 흐릿하게 비춰지는 제 얼굴에다 대고 욕을 한 번 더 지껄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처넣었다. 도로에는 지나가는 개미새끼조차 없어 온 사방이 고요했다. 택시든 버스든 올 때까지 죽치고 있어볼까 싶다가도, 일단 이 재수없는 곳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차피 왔을 때의 반대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지. 아, 집에 가고 싶다, 씨발. 오늘 무슨 마가 꼈나.

 시계도 없어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겠고, 한 두 정거장 쯤 지나치는데 갑자기 코끝을 무언가가 툭 하고 쳤다. 움찔 하며 멈춰서는데, 그 코끝을 치던 뭔가가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비가 되었다. 우산…… 같은 거 챙겨 다닐 리가 없다. 처음에는 백팩으로 머리 가리는 시늉이라도 하다가 30초만에 집어치웠다. 어차피 젖는건 똑같은데 팔만 더 아플 뿐이었다. 빨리 걸을 힘도 없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느릿느릿 걸었다. 내가 오늘 뭘 그렇게 잘못했지. 과대새끼한테 욕한 거 외엔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치만 그 새끼가 연주랍시고 하는 짓거리는 당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듣는 건 더했고. 이건 잘못이 아니라 당연한 거다. 아, 맞다. 조율 누가 이따위로 해 놨냐고도 욕했는데 그건 조율이 정말 거지같았기 때문에 역시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면 버스 안에서 잠든 거? 그렇지만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잠이 모자랐다고. 어제 왜 늦게 잤냐면, 당연히 누이가,

 ……관두자.

 빗방울이 얼굴로 들이쳐서 제대로 눈 뜨고 걷기도 힘들었다. 아직 봄이라 밤은 추워 죽겠는데 맨몸에 비까지 맞으니 얼어죽을 것 같았다. 스스로 팔짱을 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젠 여기가 어딘지도 아까의 다섯 배 쯤 모르겠고 그냥 막연히 걷기만 했다. 누이한테 전화하고 싶어도 망할 핸드폰이 꺼진 게 언젠데. 누이가 자기 전에 폰 충전하라고 잔소리할 때 말 들을 걸 그랬다. 혹시 모르니까 우산 챙기고 다니라고 잔소리하던 것도 들을 걸 그랬다. 이제 누이 말 잘 들어야지…… 그런데 말 잘 듣기 전에 여기서 비 맞아 객사할 것 같다. 우산이야 그렇다치고 전화만 됐어도. 전화, 씨발.

 그때였다. 인도를 따라 돌아선 코너에 있던 공중전화에 부딪친 게.

 아 씨발 가지가지하네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공중전화 불빛이 마치 구세주처럼 어두운 빗속에서 환히 빛났다. 아픈 이마를 문지르기도 전에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서 허겁지겁 백팩을 뒤졌다. 지갑에 쓰지도 않고 굴러다니던 동전을 손에 잡히는 대로 전화기에 집어넣고 떠오르는 번호를 거침없이 눌렀다. 누이 번호는 단순해서 외우기 쉬웠다. 너무 오래 외워서 이게 단순한 건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신호음을 들으며 젖은 머리를 미친 듯이 헤집었다. 설마 공중전화라 안 받는 건 아니겠지? 받아라, 제발, 제발 좀……

 "여보세요?"
 "……누이야."
 "쥰이예요? 왜 안 들어와요?"
 "……길 잃어버렸어……."
 "……길을 잃어버려요?"
 "어."
 "어디서요?"
 "버스 타고 잠깐 졸았…… 아니, 그냥 잠들어서 종점까지 갔는데, 택시 부르려고 했더니 배터리가 나갔어. 걸어가려고 했는데…… 비 와서.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두서 없이 설명하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추워서 그런 건지.

 "걸어서 얼마나 갔는데요……?"
 "모르겠어. 한 20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시계 없어서 몰라."
 "근처에 택시 같은 거 안 보여요?"
 "어."
 "혹시 주위에 보이는 가게 같은 거 있어요? 아무 데나."
 "가게는 없고…… 맨션만 보이는데."
 "잠깐만요."

 누이가 말이 없는 동안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검색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딘지 알 것 같은데. 비 아직도 와요?"
 "어……."
 "알았어요. 어디 가지 말고 그 공중 전화기 있는 데에 있어요. 아직도 비 맞고 있어요?"
 "아니, 지금 공중 전화 박스 안이야."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요. 데리러 갈게요!"
 "……얼른 와."

 전화는 급하게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박스 벽에 기댔다가 이내 주저앉았다. 언뜻 벽에 비치는 모양이 딱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옷도 머리카락도 다 축축하게 젖어서 무거운 데다가 춥기까지 했다. 빗방울이 박스를 때리는 소리가 안에서 미친듯이 울렸다. 듣기 싫어서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대충 귀에 꼽았다. 애초에 어디 연결되지도 않은 이어폰이었다. 그 이어폰 단자 끝이 정말 바보같아서 울적해졌다. 지나가는 차 한 대도 놓치지 않으려고 오매불망 밖만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다니는 차가 좀 있긴 했지만 빗속을 쌩하니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잠들면 얼어죽을 것 같아서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전화 끊지 말 걸 그랬다. 아니면 지금 다시 걸어볼까…… 비는 약해질 기미가 없이 더욱 세차게 내렸다. 아직도 찡한 코끝을 문지르는데 차 한 대가 인도 옆에서 급정거했다. 가까이 다가온 헤드라이트에 순간 눈이 부셨다.

 "쥰!"

 차에서 내리는 누이를 보는데 울 뻔했다. 집에서나 입는 옷 위에 가디건 하나 걸치고 온 누이는 우산을 높이 들고 멀지도 않은 거리를 뛰어 왔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천천히 일어서는데 다시 다리 힘이 풀릴 것처럼 비틀거렸다. 누이가 얼른 붙잡아주는데 손이 따뜻했다. 얘 손 원래 이렇게 따뜻했나……. 젖은 머리를 대충 정리해주던 누이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어떡해요, 다 젖었네. 일단 이거라도 입어요."

 자기도 고작 얇은 원피스에 가디건 하나 입고 나왔으면서. 그런데도 어깨에 걸쳐주는 가디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얌전히 서 있다가 그대로 누이를 안았다. 어깨 위로 올라간 팔이 멈칫하더니 이내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렸다.

 "피곤하죠. 얼른 집에 가요."
 "응……."
 "많이 걱정했어요? 길 잃어버려서?"
 "응……."

 사실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감기 걸리겠다. 집에 가서 따뜻한 거 해줄게요."

 누이 팔을 붙들고 반쯤 부축받아서 겨우 차에 탔다. 제 가디건을 다시 꼼꼼히 덮어준 누이도 다시 차에 탔다. 차 안 공기는 따뜻하고, 표현 그대로 포근했다. 구조됐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누이는 운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힐끔거리며 히터 온도를 높였다. 한 숨 자요, 피곤할텐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감았다.

 "쥰, 다 왔어요. 일어나요."

 이거 아까랑 비슷한 상황 같은데…… 하지만 눈을 떠보니 익숙한 주차장에 와 있었다. 누이가 손수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먼저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줄 때까지도 멍하니 있었다. 어서 올라가자고 누이가 손을 잡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자다 깨서 그런지 어지러웠다. 그대로 누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따뜻한 손이 등 위로 올라와 토닥인다.

 "어린 애 다 됐네요……."
 "어……."

 오는 동안 누이 가디건은 반쯤 젖고 옷은 반쯤 말라 있었다. 비는 그대로였다. 누이가 들고 다니던 물색 우산 아래에, 둘이 딱 붙어 걸었다. 힘이 없어서 느리고 좁은 보폭을 누이가 맞췄다. 정신 없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려서, 누이가 문을 열어준 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나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일단 무거운 몸을 침대든 소파든 아무데나 누이려는데 누이가 막아섰다.

 "지금 누우면 바로 잠들 거예요. 일단 샤워부터 해요. 감기 안 걸리게. 물 받아줄게요."

 신신당부를 하고는 욕실로 데려가서 변기 위에 앉히더니 물을 받기 시작한다. 뜨거운 김이 욕실에 가득 찼다. 물 온도를 재느라고 욕조 안으로 숙인 누이 뒷모습을 보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누이야."
 "응. 왜요."
 "사랑해……."
 "나도 사랑하니까 얼른 씻고 나와요."

 핫초코 만들어 줄게요. 누이는 아마 까치집이 됐을 머리를 쓰다듬고는 웃으며 욕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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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민트, 이름 그대로 사과향이 나는 민트다. 보통의 민트보다 순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차로 많이 마시고, 요리에도 많이 사용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꽃도 핀다. 희고, 조그맣고, 종잇조각 찢어 구겨놓고 뭉쳐놓은 듯한 모양이다. (더 로맨틱하게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꽃말은 민트 공통의 꽃말인 '다시 한 번 사랑하고 싶습니다'와, 애플민트만의 꽃말인 미덕.


미덕.


아마 그 미덕에 애플민트 껌을 짝짝 씹는 일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의미 불명의 파티에 오는 일도, 그 파티의 가장 구석자리에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까부터 스테이지에서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샴페인인지 뭔지를 터뜨리더니 이젠 그걸 몸에 부어 가며 춤을 추고 있다. 그 여자애들의 행태를 관찰하듯 유심히 살피는 일도 미덕은 아닐 것 같다. 이곳에서 미덕을 실천하려면 당장 여길 빠져나가 112에 전화를 걸어 미성년자들이 술과 마약에 쩔어 있다고 신고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냥 집 가서 엄마한테 시험 망했다고 자백하든지. (내 성적도 미덕에 미포함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플민트 껌을 씹고 있다고 해서 굳이 그 꽃말을 실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쪽이 더 정신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이 파티가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정신이 나가다 못해 있던 정신도 소멸할 수준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후 4시부터 판 깔고 시작했다던 파티는 이미 내가 도착한 저녁 즈음엔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따가운 조명 아래에 이미 한 무더기의 미성년자들이 약에 쩔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이 파티를 아주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일탈과 청춘이라는 시시하고 지루한 명제 아래에 자신의 젊은 육체를 아낌없이 내다버리는 것이다. 아주 멍청하고 도발적인 짓이다. (그 도발적이란 단어조차 식상해진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내가 이 하등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에서 구석에 콕 처박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여길 비웃는 일은 꿈꾸다가도 할 수 있다. 방금 춤추던 여자애들이 테이블에서 비싸 보이는 양주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고 나서 다들 진득하게 킬킬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것도 약을 탄 게 틀림 없다. 8명의 손을 탄 술병이 마지막 손으로 옮겨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양주는 그대로 곱게 원래 자리에 다시 놓아졌다.


아무도 마지막 타자가 그 술을 마시지 않은 걸 신경쓰지 않는다. 혹은 모르거나. 어차피 머리 바로 위에 달린 저 기괴한 조명 때문에 서로 얼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혼자만 쏙 빠진 마지막 타자는 스테이지로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내리더니 아까의 정신 나간 얼굴은 어디 가고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이질적이라고 표현한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차분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내가 앉은 곳은 이 클럽의 구조 탓에 조명이 벽에 막혀 눈에 잘 띄지 않는 말 그대로 구석이었다. 일종의 관객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이지와 이 소파 사이에는 각종 테이블과 술병과 사람이 엉켜 있다. 그 사이를 뚫고 눈이 마주쳤다고 하면... 답이 없다. 그 많은 장애물을 아주 유연하게 비켜가면서 이쪽으로 척척 걸어오는 걸음이 또박또박하기도 하다. 나는 버리기 귀찮아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껌종이를 꺼내 단물 다 빠진 껌을 뱉곤 아무 데나 집어던졌다. 은색 껌종이도 사뿐히 피하는 걸음.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 온다.



"재밌어요?"
"...아니."



이치하라 누이가 피식 웃었다.



"거기 그러고 있을거면 여기 왜 왔어요?"
"초대받아서."
"초대? 누구한테?"
"우리 반 반장. 타케야마."
"아, 그 등신."
"그래도 선배님인데 그렇게 막 불러도 되냐."



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일단 그 새끼는 등신이 맞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익숙한 얼굴을 꽤 많이 봐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치하라는 대번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등신."



내가 반응을 안 해주니 또 혼자 피식 웃는다.



"재미없네요."
"누가."
"선배님이요."



넌 꽤 재미있는데,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여기 물 없어요? 이치하라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어디선가 음료수 병을 찾아왔다. 레몬 탄산수. 뚜껑을 열고 서슴치 않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아까랑은 영 달랐다.



"뭔 줄 알고 마셔."
"탄산수요. 마실래요?"
"아니."
"약 안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
"비밀."



다 마신 병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그 위에서 또 뭘 찾는다. 안에 투명한 액체가 반쯤 남은 주사기를 집어들더니, 그대로 플라스틱 뚜껑 위에 박아넣는다. 피스톨이 끝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주사기를 바닥 어딘가로 집어던졌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보여서 조금 감탄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하는 건데?"
"재밌으라고요. 선배님 마실래요?"
"안 마셔."
"그러니까 재미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너도 별반 다를 거 없지 않냐."



새초롬하고 맑은 얼굴빛, 여기선 찾아볼 수 없는 안색이다. 이치하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는 여태껏 지켜보고 있었던 스테이지 위의 여자애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정신 나갔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약에 술에 취해 있던 애들. 단 한 명 빼고.
샴페인을 먼저 딴 건 이치하라였다. 이윽고 다들 그걸 머리 위에 붓고 난리를 치느라 흠뻑 젖은 꼴이 됐는데 이치하라의 옷은 새하얀데도 젖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자기가 무슨 꼴인지도 모르고 춤을 추는 와중에도 이치하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손으로 빗어내렸고, 때로 속내가 훤히 보이는 남자들이 올라올 때마다 웃으며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향했다. 조명이 너무 밝고 눈에 띄어서, 사진에 찍힐까봐 다들 슬금슬금 피하는 곳. 하지만 저기서 사진을 찍히면 오히려 얼굴이 조명 때문에 하얗게 날아갈 거란 생각까지 할 정신머리가 있는 인간은 여기에 몇 없다.




"그래서, 시험 끝날 때마다 이렇게 개차반처럼 노는 거야?"
"아니요?"
"처음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시험이랑 상관 없이 2주에 한 번씩."
"약 해?"
"안 해요. 내가 미쳤다고?"



등신, 이라고 말하던 눈빛으로 다시 날 본다.



"그럴거면 굳이 여기서 안 놀아도 되지 않냐?"
"나 훈계하려고 온 거 아니죠?"
"그냥 궁금해서."
"이유 그런 거 없어요. 여기가 제일 재밌거든요."



그러더니 내 눈앞에 오른손을 들어보인다.



"첫째, 취하지 말 것."
"뭐하냐."
"둘째,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
"..."
"셋째. 마음껏 즐길 것."



세 손가락이 접힌 손을 만족스러운 듯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득 다시 껌이 당겼고,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껌 씹을래?"
"응."



그리곤 내가 내밀기도 전에 손에서 쏙 빼가 입에 넣는다. 애플민트 향이 약하게 감돈다.



"그럼 난 다시 갈래요."
"어딜."
"스테이지."



점점 말이 짧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껌을 씹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이치하라는 인사도 없이 바로 스테이지를 향해 돌아섰다. 흰색 프릴이 달린, 보통 여자애들은 데이트 할 때나 입을 법한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린다. 나는 껌을 입에 넣었다. 달고 화한 애플민트 향이 입안에 다시 가득 찬다. 미덕, 그 꽃말을 다시 떠올린다. 미덕, 이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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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a  (0) 2015.12.06


 꿈은 바다처럼 일렁인다. 누이는 이제 많이 익숙해졌다.
 쪽빛,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닷빛이 가장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바다에 물결이라도 치는 듯 밝은 라일락 빛이 스며들어 있다. 이건 아마도 쥰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 일정한 박자라도 있는 듯 사르르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빛, 목마른 숨소리가 담긴 짙은 크랜베리 빛이 조심스럽게 바다 아래에 잠겨 있다. 매번 꿈을 꿀 때마다 그 붉은 빛이 점점 블루베리의 보랏빛으로 바래가고 있다.
 꿈꿀 때 의식이 있는 게 피곤하다거나 불편하다고 여겨본 적은 드물었다. 어차피 딱히 내용이 있는 꿈도 아니고, 악몽도 꾸지 않는다. 꿈은 누이의 의식 아래 완벽하게 조종된다. 깨어있을 때와 다름없이, 그저 잠시 독백을 하는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부터 누이는 조금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잠이 부족하거나 얕아서 생기는 피곤함이 아니라…… 이 대목에서 항상 누이는 더 형용하지 못해 독백을 멈추었다. 어쩌면 그 형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피곤함일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색들은 규칙적이다. 바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누이가 잘 때 쥰이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 자고 있어도 다 볼 수 있다. 거기서 네가 어리다고 하는 거야, ……라고 누이는 쥰에게 말하지 못했다. 바다가 아닌 다른 빛이 떠오른다면 악몽이라고 느낄 쪽은 누이니까.

 바다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다. 무거운 먹빛의 절벽에 서서 지켜본다.
 그런데 순간 그 바다가, ……스펙트럼에 산란되는 듯 부서지기 시작한다.

 쪽빛은 점점 기지개를 켜는 듯 하더니 이내 눈부신 상아색으로 뒤집힌다. 라일락 빛은 어느새 멈추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꽃의 형상을 닮은 맑은 흰색이 채운다. 누이는 제 눈을 비볐다. 꿈인 걸 알면서도 눈을 비볐다. 그래도 색은 부서짐을 멈추지 않았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가 섞여 있는 듯하던 깊은 심해가, 덜 읽은 복숭아의 쓰고 단단한 분홍빛으로. 먹색의 절벽이, 풀비린내 나는 찬란한 녹빛으로. 누이는 어느새 바다가 아니라 덜 자랐음에도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래서 눈을 떴다. 너무 놀라서.
 눈을 떠 보니 쥰이 저쪽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야……."
 "깼어?"
 "너 그거…… 다시 해 봐."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보던 쥰이 이해 못했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악보를 한 장 넘기는 소리에서, 그 라일락 색이 다시 스쳐지났다. 건반 위로 올라가다가 가볍게 부딪친 손끝에서, 메이플 시럽의 맑은 갈색이 비쳤다.

 그리고 누이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니,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부드러운 상아색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펼쳐지는 색들. 꿈이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색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자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실로 짜내듯 단단하게 얽혀서 어지러이 흩어지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듯 눈앞에서 반짝거린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누이는 저도 모르게 그 색들에게 손을 뻗어 보았다. 빛과 똑같이 잡히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누이의 눈에 보일 뿐이었다. 무게 없이 부유하는 색들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린다. 그리고 그 빈틈 사이에, 쥰이 치고 있는 피아노와 같은 맑고 우아한 건반의 색이 차오른다. 높은 음의 소리에서 햇볕의 색이, 낮은 음의 소리에서 노을의 색이 진다. 너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이 순간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듯 선명하게.

 연주가 끝나고 불시에 색들이 사라졌을 때에도 누이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뭐라고 말이 없자 돌아본 쥰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이는 그제야 비로소 꿈에서 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서, 다시 바다의 색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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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이었다. 첫눈은 이미 한참 전에 온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머지 않아 채 녹지도 못한 더러운 눈 위로 질척거리는 비가 내렸다. 비였다가, 다시 눈이었다가, 이내는 진눈깨비가 되었다. 마를 날 없을 것처럼 구는 하늘은 성에 낀 창문처럼 희끄무레했다. 볼은 얼어 따갑고 손끝은 감각이 없었다. 교복 위에 겹쳐 입은 외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의 폭과 반경이 좁아졌다. 발걸음 옮기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사실은 귀찮은 계절. 그 귀찮음이야말로 겨울이었다. 한 겨울.

 그리도 귀찮은 계절에, 이치하라 누이가 사람을 죽인다.


당신 앞의 살인자


 1. One Day


 아니, 이미 죽였다.

 누이의 시야는 오로지 텅 빈 하늘로 꽉 차있다. 보기만 해도 손끝이 시려오는 철제 난간만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굳이 내려다 볼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머리가 깨지고 온 몸이 기괴하게 비틀려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텐데 누이는 그런 걸 전혀 못 보는 성정이었다. B급 공포영화에서 피가 튀는 식상한 장면조차 견디지 못하는 비위를 가지고 있는데 화면이 아닌 진짜를 볼 수 있을리가 없지. 문득 생각의 연쇄를 타고, 눈 가리고 겨우 봤던 그 피 튀기는 장면이 떠올랐다. 피 튀긴다고는 해도 이제 거의 잊어버려서 떠올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느낌이었더라, 시뻘겋고, 찐득거리고, 더럽고, 역겨웠지.

 이치하라 누이가 그렇게 사람을 죽였다.

 사실 보질 않았으니 진짜로 그렇게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이프로 난도질 당하는 것과 5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비슷한 죽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죽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모습이든 죽음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이고, 이번에는 그 죽음을 누이가 만들었다. 죽음을 만든 사람, 죽인 사람, 그래, 살인자. 살인자다.

 이치하라 누이는 이 순간부터, 아니, 그 손을 놓았을 때부터 살인자이다.

 살인자라는 단어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그 3분 이후 누이가 스스로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순간은, 다부진 발걸음으로 두어 걸음 척척 걸어가 차갑고 딱딱한 난간을 ―착각인지 현실인지 모를 미온이 남은― 손으로 꽉 쥐고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이다. 단순히 비위가 약하다는 이유로 보지 않을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자마자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닥을 느리게 흘러가는 피의 양을 눈대중으로 어렴풋이 가늠해보는 동안 비위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감지도 못한 눈동자가 흐린 하늘을 향해 있다. 마지막으로 본 하늘이 저따위라니. 누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우 그치나 싶었던 진눈깨비가 지금 당장 내리기라도 할 듯했다. 누이는 다시 시체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비하면 눈이 아프게 느껴질 정도의 선명하고 진득한 붉은 색, 눈을 깜빡였다.

 그도 눈을 깜빡였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넥타이의 색깔은 짙은 초록색, 3학년. 누이의 목에는 저 피보다 밝은 빛의 리본이 매어져 있다. 누이는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이목구비가 정확히 보이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깜빡.
 눈이 마주쳤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눈이 깜빡이는 걸 알아봤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제 눈이 깜빡이는 걸 잘못 알았거나. 하지만 누이는 그 깜빡임 사이에 묘한 금이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벽이 벌어진 틈에서 시멘트 모래가 파스스 떨어지는 듯한, 건조한 시선의 연결. 그는 누이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시체로부터는 채 열 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시체에서 흐른 피는 그의 발치를 향한 방향으로 스며들고 있다.

 문득 눈앞에 굵은 눈송이 하나가 휘날려 떨어져갔다.

 누이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러나 시선은 고정한 채로 천천히 물러섰다. 금방 그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앞에 흘려졌던 눈송이는 그와 가까운 곳 어딘가에 떨어졌을 것이다. 혹은 시체 위로 내려앉아 핏물에 녹아내렸거나. 누이의 코끝과 발등에도 눈송이가 하나씩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금세 녹아버렸다. 공기가 얼어붙은 듯 사방은 고요하다. 눈송이에게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뺨이 따가웠다.

 누이는 옥상에서 도망쳤다.



 2. The Day


 소문은 누이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또다른 것들 중 하나였다.

 수없는 소문이 귀를 찔러댔다. 어차피 남들에게 다 들릴 걸 알면서도 의미없이 낮게 내려깐 목소리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단어들. 누이는 참지 못하고 교실을 나섰지만 당연히 학교 안에서 사람을 없는 곳을 찾는게 더 힘들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손을 씻고 있으니 거울에 소리가 반사되는 것 같았다. 물을 사방에 다 튈 정도로 세게 틀어놓으니 치맛자락이 젖었다.


 그래서, 걔 뭐래?
 근데 자살하겠다고 원래도 존나 나댔잖아. 누가 진짜 죽겠다고 생각하냐.
 좀 불쌍하긴 하다. 또라이같긴 했는데…….
 걔 우울증 있었대. 자살하겠다고 한 것도 다 우울증 때문이라고.


 결국 수업 종이 치고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을 때, 누이는 화장실 구석 칸에서 토할 수밖에 없었다. 비위가 극도로 상한 탓이었다. 먹은 것도 없어 나오는 것도 없었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위액인지 침인지조차 모를 것만 꾸역꾸역 뱉어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입에서 비린내가 났다. 한 차례 입을 헹구고는 이미 수업이 시작된 교실을 뒤로 하고 양호실로 갔다. 웬일인지 확인증조차 받지 않고 바로 침대를 내어 주었다. 손수 이불을 펴 주는 양호 선생의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양호실은 따뜻했고, 이불까지 덮으니 금방 잠이 왔다.

 깜빡.

 눈을 떴을 때 양호 선생은 잠시 나갔는지 없었다. 30분 남짓의 얕은 잠이었는데도 개운했다. 누이는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놓고, 양호 일지까지 기록한 후 다시 교실로 향했다. 복도로 가던 중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교실에서 다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발걸음이 가뿐했다.

 다시 그 아이를 죽이는 꿈을 꾼 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붉은 꿈.

 청소 시간은 급히 끝났고, 이내 종례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착실히 자리에 앉아 담임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 명도 자리에서 빠지지 않은게 드물다 싶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담임 선생이 들어왔다. 그는 묵직한 눈빛에 굳게 다문 입을 잠시 깨물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문을 말하는, 낮은 목소리. 다시 귓가에서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조문을 가고 싶은 아이들은 주소를 알려주마.

 그것으로, 종례는 끝이었다.



 3. That Day


 누이는 조문을 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다. 누군가가 살인자라며 자신의 목을 잡아챌까봐.
 그리고 그런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암묵적으로 아이는 자살한 것으로 결론난 모양이었다. 자살하고 싶다는 메시지 기록은 차고 넘쳤다. 요즘 방에서 나오는 법도 없고 대화한 적도 없었다는 부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는 몇몇 가까웠던 아이들의 증언과 아이의 교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분실되었던 옥상 열쇠, 중앙 계단에 설치된 CCTV에서 발견된 혼자 옥상을 올라가는 장면까지. 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은 1학년 남학생이었다. 시체의 목격자는 시체가 이송될 때까지 그 주위에 몰려들어 있던 학생들 전부였다. 눈이 조금 쌓여 일시적으로 피가 하얗게 덮였던 블록은 다음 날 바로 교체되었다.
 자살한 아이의 장례식이라는 이유로 2일장으로 치뤄진 장례에는 아이의 생전 친구들과 선생들이 조문을 갔다. 살아있을 적엔 손에 꼽는 문제아로 꽤나 손가락질 받았던 아이는 많은 사람들의 추모와 애도를 받고 갔다. 부모는 여전히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두어번 실신했다며 장례식에 다녀온 아이들이 말했다. 다들 죽은 아이를 불쌍히 여겼고, 자살했다는 것을 속으로는 섬짓하게 느꼈다. 한동안 학교는 물에 침잠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도 이치하라 누이를 살인자라고 지목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그 아이는 확실히 꼼꼼했던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는 누이가 조달해주던 물건들을 항상 학교에 두었다. 누이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집에 흔적을 남기는 것에 비하면 학교에 남긴 흔적은 훨씬 치우기 쉬웠다. 누이는 아이의 사물함 비밀 번호를 알고 있었고, 아직 남아 있던 물건들을 몽땅 수거했다. 부모는 부검을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약물의 흔적 따위가 남아있는지 아닌지는 이제 알 도리가 없다. 아이는 화장되어 고운 뼛가루로 납골당에 안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기적이라고 표현하려면 다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하지만 기적에 가까웠다. 누이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는 습관이 들어 있었고, 후관은 건물이 낙후되어 서쪽에는 복도 끝 CCTV 외에는 다른 CCTV가 없었다. 아이의 마약 중독 증세는 신기할 정도로 우울증과 닮아 있었다. 뭐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아이의 습관도 그랬다. 통화기록 어디에도 누이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누이는 아이와 얼굴을 맞대거나 둘이 직접 주고받는 쪽지로만 이야기했다. 그 철저함이 이런 곳까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구역질이 났다. 누이는 장례식이 끝난 후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말하자면 누이가 의심받을 구석조차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3학년은 2학년보다 종례가 늦었다. 누이는 그가 자습을 하진 않을까 싶어서 3학년 복도에서 죽치고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종례가 시작되기도 전에 반을 나섰다. 자기보다 얼핏 10cm는 더 큰 키에,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너무 선명한 그 지루한 얼굴을 금방 알아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눈이 마주쳤든 말든 누이를 지나쳐 걸었다. 누이는 저보다 반 걸음은 더 큰 보폭을 일정한 간격을 놓고 쫓아갔다. 그리고 본관 건물을 나섰을 때, 그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깜빡, 눈이 한 번 깜빡였다.


 "왜 말 안 했어요."
 "내가?"
 "봤잖아, 내가 죽인 거."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의 말투는 그가 하고 있는 눈빛만큼이나 지루하고 느렸다. 1학년과 2학년은 이미 하교했고, 3학년은 아직 종례가 끝나지 않아 사방은 고요했다. 그날처럼. 누이는 가벼운 무게로 말을 이었다. 그 역시 별 것 아니라는 듯 짧게 대답했다.


 "끝까지 모른 척 해줄 거 아니면,"
 "뭘."
 "그냥 지금 가서 말해줘요."
 "그러니까 뭘."
 "내가 도망치기 전에."


 겨울 해는 당연하다는 듯 일찍 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빠른 속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순간 그 앞에 하얀 것이 스쳤는데 그게 번뜩이는 빛인지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누이가 그 하얀색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는 처음으로 길게 말했다.


 "뭘 얘기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럼 네가 직접 자백해." 


 누이는 간만에 소문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스친 것은 정말로 눈이었던 모양인지 정수리에 무언가가 차게 닿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니 완전한 눈이 아닌 진눈깨비였다. 차가운 물방울이 묻어난 손끝을 치마에 터는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복 바지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일순간 교내에서 잘도 그런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생각이었다.


 "난 비겁해서 자백은 못하거든."
 "그럼 나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요?"
 "모르겠는데."


 소문을 말하지 않는 대신 완전히 말이 안 통한다. 누이는 약간 학을 떼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끝까지 모른 척 해줄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하얀 담배연기를 뱉었다. 연기는 진눈깨비와 탁한 겨울의 공기색과 섞여 허공에 짙고 진득하게 감겨들었다. 누이는 참을성있게 기다렸고, 그 연기가 겨우 바람에 휩쓸려 흩어질 즈음에야 그가 다시 말했다.


 "난 성가신 건 질색이야."


 누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손에 든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곤 제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도 피워?"
 "잠깐 피우다 끊었었어요. 냄새를 숨길 수가 없어서."


 그 질문은 좀 바보같았다.

 어쨌든 어느 쪽도 학교 안에서 할 짓은 아니지. 흡연과, 살인. 누이는 학교에서 하면 안 되는 짓들을 더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리곤 담배를 두어 모금 피우고는 다시 건넸다. 그는 받지 않았다. 누이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시 담배를 물며 말했다.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안 믿을게요."
 "……."
 "좋을 대로 하세요."


 깜빡. 확실히 그의 눈이었다.

 누이는 반 정도 태운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이제 슬슬 3학년들이 나타날 시간이다. 본관 창에 비치는 그림자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저리도 흐릿한 그림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있는데, 왜 아이가 죽은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할까요. 누이는 굳이 입으로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그랬듯이. 문득 그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마키하라 쥰. 파스스 부서지는 금과 같은 눈빛을 가진, 혹은 그런 눈빛을 짓게 만드는. 아니, 어쩌면 누이 때문에 그런 눈빛을 짓게 된.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이는 반 정도는 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이는 살인자고, 그는 목격자니까. 시체의 목격자 말고, 살인의 목격자. 유일한 목격자.

 이윽고 알고 있던 대로 3학년이 하나 둘 본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누이는 그날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앞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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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형용사로 대변할 수 있는 것들 말고, 자외선이나 공기같은 것들 말고, 정말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자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 애초에 자각해야 한다는 자각부터가 없는 것들. 마치 다른 세상에 분리되어 있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존재 그 자체로 존재를 입증하는 것들, 그나마 비슷한 단어를 따오자면 환상과도 같은. 그러나 환상과는 전혀 다른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Fantasia



 소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쥰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쥰은 멍멍해진 귀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이명이 귓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빙빙 맴돌다가 손을 떼자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이명의 자리를 급격한 피로감이 채웠다. 감각이 무겁게 뭉쳐버린 것 같은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내려놓았다. 점점 휴식의 텀이 빨라지고 있다. 교수님이 보고 있었다면 농땡이 피운다며 호되게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쥰 혼자였다. 그런데도 차마 집 가버릴 생각은 못하고 코트에 지갑만 챙겨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의 공기가 달랐다. 그제야 목이 칼칼한 걸 느꼈다.


 "어디 가냐?"
 "담배 한 대 피우러요."


 건반에 담배 냄새 배겠다, 지나가던 선배가 잔소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툭 던졌다. 대답없이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방의 거울이 한가운데의 쥰을 집요하게 비췄다. 애써 무시하고 낮아지는 층수만 쳐다보았다. 느렸다.
 찬바람이 코끝을 베어내는 듯 했다. 쥰은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슬슬 겨울이 되니 나와서 담배 피우는 것도 고역이었다. 무딘 손끝으로 겨우 담배갑을 꺼냈더니 돛대였다. 욕지거리 할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라이터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결국 씨발 소리가 튀어나왔다. 기껏 입에 문 담배를 버릴 생각도 다시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목석마냥 찬바람 다 맞아가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편의점까진 채 10분이 안 걸렸다. 근처에 있는 술집에 과모임 명목으로 몇 번 끌려다닐 때 대피하듯 들락거렸던 곳이었다. 크기는 작아도 식당가 한가운데에 있어서 그런지 매번 손님이 몇 명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보인 온장고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고, 환타지아 주세요, 담배 한 갑을 계산하는 여자 뒤에 섰다.


 "버지니아 슬림 하나요."
 "어떤 거요?"
 "레드. 라이터 하나도."


 유리문은 바람이 밀고 있기라도 한 건지 썩 부드럽게 열리질 않았다. 힘주어 여니 바로 칼바람이 얼굴로 들이쳤다. 지겨운 겨울,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눈물이 잠시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뜨자 쏙 들어갔다. 서서 코를 훌쩍거리는데 감기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는지 처음 맡는 달큰한 냄새가 바람 비린내와 섞여 났다.

 향담배였나, 그거.

 너무 익숙해서 놓치기도 하는 흔한 담배 냄새 사이로 거슬리는 달콤한 냄새. 향기라고 하기엔 어차피 담배 냄새였지만. 쥰은 향담배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했다. 차라리 담배 연기에다 대고 향수를 뿌려대는 편이 더 향기로울 것이다. 과일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모티프를 알 수 없는 달큰함이었다. 짜증스럽게도 그 냄새는 바람에 휩쓸린 건지 목적지가 쥰과 같은 건지 학교로 돌아가는 길 내내 쥰의 한 걸음 앞에서 약올리듯 떠돌았다.
 바람 속을 걸어오는 동안 이미 캔커피는 반쯤 식어 미지근했다. 더는 진절머리나는 추위 속에 있기 싫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추위는 문이 닫히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졌지만, 그 달큰한 냄새는 끈질기게도 남아 있었다. 지겨운 냄새. 쥰은 그 자리에 서서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인스턴트 커피 향이 빠르게 지워지기가 무섭게 다시 고개를 드는 냄새를 피해 건물 구석 비상구로 들어갔다. 2층과 3층 중간 쯤에 자리잡아서 돛대를 다 피우곤, 비어버린 담배갑을 구겨 주머니 속에 넣었다. 달큰한 냄새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쨌건 다시 올라가야 했다. 벌써부터 소리가 귓가를 뭉근하게 눌러오는 것 같았다.



***



 연습이 끝나고 나니 해가 져 있었다. 하늘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남은 노을 자국을 바라보며 쥰은 연습실을 나섰다.

 연습이 끝나기 한 시간 전 교수님이 잠시 들렀다. 그는 이 학교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교수 중 하나였다.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했지만 그 제자들 중 누구도 그의 전성기를 넘는 평가를 듣지 못했다. 사실 그 훌륭함은 대개 스승의 빛에서 반사된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쥰은, 지금 그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물론 쥰이 교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소리가 탁해. 방금 자다 깬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것 같잖냐."


 혹은 방금까지 담배 피우던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것처럼요. 쥰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건반에 정말 담배 냄새가 배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교수님도 담배를 피웠다. 그렇다고 쥰처럼 피아노 치다 말고 냅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쥰은 헤비 스모커였고, 교수님은 애연가였다. 어쨌든 서로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자각은 해이해지는 법이었다.


 "연습 게을리하지 마라."


 쥰의 실력이 순수히 연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의외로 둘은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아는 편이었다. 이해보다는 일종의 지식과도 같았다. 그래서 쥰은 제 교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의 관계였다면 싫어했을 테지만.

 어쨌든 오늘은 더 소리에 짓눌릴 일은 없었다. 밤이 되어 낮보다도 한층 사납고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집으로 가려면 정문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게 가장 빨랐다. 그래도 후문으로 돌아간 건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였다. 저녁이 되기가 무섭게 식당가에는 네온사인과 간판 불빛이 번쩍이기 시작했고, 벌써부터 술에 한 김 취해 맛이 간 대학생―아마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을―들이 시끄럽게 길거리에서 떠들어댔다. 쥰은 익숙하게 그 무리들을 무시하고 유일하게 조용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이면 대충 저녁을 때우려는 사람들과 귀가 전 간식거리를 사가는 사람들과 술 혹은 숙취해소제 혹은 둘 다 잔뜩 사가는 사람들이 몰려 낮보다도 북적였지만, 그래봤자 주변 식당들에 비하면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쥰은 진열된 것 중 어느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바로 계산대 줄을 섰다. 두어 명이 계산을 마치고 나서야 차례가 왔다.


 "환타지아 주세요."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알바생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물었다.


 "환타지아요?"
 "네."
 "……그게 뭐예요?"


 쥰보다도 어려 보이는 여자 알바생은 어리버리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저녁이 되기 전에 낮의 그 사람과 교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알바생은 쥰이 기억하기론 두 달 넘게 이곳에서 이 시간대에 일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쥰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환타지아요. 담배."
 "담배요? 그런 담배는 없는데."
 "아까 누가 사가는 걸 봤는데요."
 "언제요?"
 "낮에."
 "잠시만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담배 진열대를 다시 돌아보는 알바생을 보면서, 쥰은 슬슬 직감했다. 대개는 파랗거나 은빛인 차가운 색감 가운데인 담배갑들 중에서, 그렇게 달큰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것은 없었다. 두어바퀴 정도 손으로 진열대를 하나하나 읽어 내리던 알바생의 표정에는 어느새 난처함이 떠올라 있었다.


 "환타지아는 없는데요……."


 쥰은 결국 아무 것도 사지 않고 편의점을 나왔다. 사지 못했다고 하기엔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의문스럽거나 하지도 않았다. 잘못 들은 걸 수도 있고, 아마 그건 아닌게 확실하지만, 혹은 우연이 겹쳐서 그랬을 수도 있다. 굳이 그걸 파헤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달큰한 냄새, 이젠 달큰하다는 단어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기억은 이미 휘발되어 없었다. 그래서 개운하고 말 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만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40분간 기다려서 탔을 때는 조금 짜증이 났다.



***



 교양 시간에 맘껏 졸다가 연습실 예약 시간을 잊을 뻔 했다. 공교롭게도 언제 설정해뒀는지 모를 진동 알람이 울렸다. 쥰은 적당히 눈치를 봐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한창 강의 진행 시간이라 조용했다. 엘리베이터의 내리는 버튼을 눌러놓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다시 났다. 그 달큰한 냄새.

 어떤 여자가 쥰 한발짝 옆에 섰다. 아마도 처음 보는 건 아닐 것이다. 검고 긴 머리에 가려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큰 키에 높은 구두를 신고,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온통 까맸다. 그리고 그 까만색에서 달큰한 냄새가 풍겼다. 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는 한쪽 발끝을 바닥에 톡톡 두드리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올라탔다. 그 짧은 걸음에서조차 무섭도록 진한 자국이 남았다. 여자가 먼저 1층을 눌렀고, 쥰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서야 겨우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히자 곧 지독하게 느껴질 정도로 달큰한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겨운 공기.

 7층을 서서히 내려가는 동안 여자는 어디선가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이질적일 정도로 샛노란 색의 담배였다. 언뜻 스친 금색 틴케이스 위에 무언가 영어 필기체로 써 있었다. 환타지아. 연습실에서 스쳐 들었던 어느 환상곡을 떠올리는 자신이 바보같았다. 여자는 옆에 있는 쥰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곧바로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 불이 붙고 빨아들이기가 무섭게 달큰한 냄새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쥰은 코를 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고 억지로 그 환상곡의 작곡가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작곡가는 너무도 빨리 기억났고, 그래서 쥰은 눈앞의 광경에 순식간에 잠식되어 버린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던 여자는 담배를 빨아들일 수록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딱히 웃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미소였다. 옅게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쥰은 어느새 자기가 여자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담배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담배 연기가 아니라 달큰한 냄새에 가려진 것 같았다. 여자는 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내뿜고서는 완전히 웃는 얼굴이 되어 쥰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눈.

 
 "보여? 무지개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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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잖아, 가끔 이상한 것들이 있지. 5월부터 찾아오는 한여름의 태양이나, 한겨울에 계속 되는 장마같은 거 말이야. 원인이 어떻다고 다들 떠들어대지만, 아무도 마음 속에 한 번 도사린 이상함을 절대 몰아내진 못하지.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이상한 것들, 이를테면 고작 일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내 과거의 행적들, 그것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기 싫은) 자정 직전의 실낱같은 찝찝함. 글쎄, 이상한 것들은 사실 아주 많아, 너무 많아서 차마 세어 보거나 어떻게든 맘에 들게 고쳐 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거지. 이를테면 이 한 문단조차도.

 정말 이상하게도, 이상한 것들이 있어.


환타지아



 "이름 촌스러워."


 쥰이 한 말 치고는 꽤…… 감성적이다. 그런 표현이 떠오르자 곧바로 웃음이 터졌다.


 "무지개색 연기가 난대요."
 "그래?"
 "이상하지 않아요? 색이면 그냥 색이지, 무지개색이라니."


 무지개색,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라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잖아요. 무지개는 어차피 빛이니까, 다 합치면 투명해질텐데…… 학생 시절 배웠던 걸 더듬더듬 나열하던 누이의 말이 점점 느려지다가 이내 끝 아닌 끝을 맺었다. 마침표를 찍듯이 잡지 종이가 팔랑거리며 넘어간다. 누이는 한 달 동안 붙들고 있던 전쟁같은 마감에 대한 전리품처럼 월 초중순마다 제가 글을 쓴 잡지 한 부를 들고 오곤 했다. 그것도 회사에서 받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꼭 저 앞 서점에서 돈 주고 사왔다. 그렇게 쌓은 적립금으로 이번 달 잡지를 사와서는 테이블 한가운데에 펼쳐 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고 있었다. 차라리 정기구독을 신청하지 그러냐. 쥰이 말했더니 누이가 오히려 의아하단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자니 쥰은 딱히 부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마감할 땐 항상 이번 달만 끝나면 때려 치우겠다고 선언하면서 누이는 잡지를 꽤 즐겁게 읽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이렇게 보면 재밌다고 했다. 오탈자를 발견할 때마다 웃기다고 깔깔거렸고, 화보를 한참이나 훑어보고는 사진 더럽게 못 찍었다고 하곤 넘겨버리기도 했다. 제가 쓴 글은 제법 심각하게 읽는 것 같긴 했지만, 항상 마무리는 "역시 내가 제일 정상인이야." 정상인…… 쥰은 그냥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그럼 그 고갯짓을 보던 누이는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마감할 때 회사 와 보면 알 거예요."


 어느새 다 읽었는지 잡지를 덮었다가, 다시 아무 페이지나 펼쳐냈다. 언뜻 보기엔 형형색색 화려한 페이지. 순간 쥰은 누이와 누이의 손끝을 번갈아 보곤 시선을 느리게 깜빡였다. 누이는 제 얼굴에 신호등처럼 깜빡이는 시선을 모르는지 그 색깔들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매끈하고 얇은 종잇장을 넘기는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테이블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린다. 손톱과 유리가 부딪쳐 낮은 소음이 울렸다. 그 소음과 비슷한 무게로, 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나랑 약속했지."
 "네에, 네에. 끊는 중이에요."


 그와 반대로 누이의 목소리는 가볍게 늘어진다. 여전히 돌아보지는 않는다. 혹은 돌아볼 생각이 없거나. 그리곤 드디어 손을 멈춘 누이가, 잡지를 덮어 옆으로 치웠다. 쥰이 미처 솎아내지 못한 불만스러운 시선을 마주치며 슬그머니 웃고는 먼저 달려든다. 이 다음에는 아마 입막음일 것이다.


 "입."


 키스는 제법 오래 갔다. 혀에서 단내가 물씬 풍겼다. 한창 딸기맛 사탕만 먹다가 질렸다고 어제부터 레몬맛으로 바꿨는데 괜히 바꿨다고 사탕 먹을 때마다 말하곤 했다. 쥰이 느끼기엔 딸기맛이나 레몬맛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누이는 사탕 굴려먹는 버릇 그대로 마무리하곤 입을 뗐다.


 "내가 왜 싫다고 했는지 알 것 같죠."
 "어. 딸기가 낫다."
 "체리로 바꿔야겠어."


 그러면서도 잽싸게 동그란 틴케이스를 열고는 샛노란 사탕을 입안에 밀어넣는다. 사탕 하나 다 먹으면 맛없다고 커피 한 잔 마시고, 그 다음에 다시 사탕, 그 다음엔 다시 커피였다. 나 이거 끊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종류의 중독자가 된 것 같아요. 이틀에 한 번 마트에 사탕 사러가며 누이가 말했다. 그게 더 낫다고 쉽사리 말하지 못한 건, 확실히 사탕이 맛이 없긴 해서였다. 단 거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니었다. 쥰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쥰."
 "어."
 "여기 우리 집 아니긴 한데, 나가라도 해도 돼요?"
 "……그래."


 추운 베란다로 나와 쪼그려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이는 아예 커튼까지 닫아버리나 싶더니, 이내 얼굴을 반쯤 내밀고는 말했다. 유리에 막혀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빨리 들어와요.


 손을 흔들어주니 끄덕이곤 커튼을 마저 닫는다. 다음부턴 커튼 떼어버릴까.



 *



 월초 야근이 익숙해지니 월말 야근에 적응해야 했다. 누이에게 다섯 시에 문자가 왔다. [8시] 여섯 시에 또 왔다. [9시] 배고플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저녁을 먹은 때가 여덟 시 반이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아홉 시였다. 정적, 그래도 TV를 켜기는 싫어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시간은 더럽게도 안 갔다.

 결국 아홉 시 십 분 전에 전화가 왔다.


 "인쇄는 내 담당이 아닌데요."
 "응."
 "나도 왜 내가 참견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응."
 "나 신데렐라 하고 싶어요."
 "유리구두 사둘게."
 "응. 250으로."
 "너 245 신잖아."
 "밤새 춤추거나 야근하면 발이 붓거든요."


 누이는 마지막으로 한숨 쉬며 말했다.


 "기다리지 말고 자요."
 "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똑같이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누이는 야근 때마다 전화해서 꼭 덧붙였고, 쥰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대답은 대답이고 쥰이 정말로 자고 있었던 적은 얼마 없었다. 그래서 자정 훨씬 넘어 한 시 가까이 돼서야 퇴근한 누이는 괜히 초인종을 한 번 눌렀고, 두 번, 세 번 눌러도 잠잠하자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왔다. 누이가 들어오자 켜진 현관 센서등을 제외하면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자요? 알면서도 허공에 물어봤다. 답은 없었다.
 안방 문이 조금 열려 있어 들여다봤다. 옷차림을 보아 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냥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누이는 쥰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은 후, 거실 불을 켰다. 소파 가죽이 차가웠다. 스타킹을 벗어던지고는 소파에 늘어붙어 밍기적거렸다. 30분이 넘게 지나도 쥰은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스타킹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겉옷은 이제서야 벗어 소파에 걸쳐 놓은 누이는 한참이나 방문을 바라보다 겉옷 주머니에서 얇은 틴케이스를 꺼냈다. 사탕은 아니었다. 좀 달긴 했지만.

 서랍에서 쥰의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붙일 때 잠시 열기가 달아올랐다 금세 사라졌다. 깊게 빨아들이고, 한숨 쉬듯 내뱉었다. 피곤했다.

 다 먹은 사탕 케이스에 대충 재를 털었다. 담배 냄새와 레몬향이 섞여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이상한 냄새…… 문틈으로 연기가 샐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집안에서 피우는 거니까 쥰이 일어나기만 하면 바로 들키긴 들킬텐데,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쥰, 나 다른 종류의 중독자가 된 게 아니라 그냥 더 중독자가 된 건가봐요. 아마 이렇게 말하면 혼나겠지. 
 연기는 형광등 아래서 기묘하게 구부러졌다. 무지개색, 무지개색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향은 제법 다채로워서 딸기맛 레몬맛 청포도맛 블루베리맛 사탕 한 데 섞어놓은 것 같긴 했다. 반쯤 넘게 태우고 나니 슬슬 끌까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안녕?"
 "……."


 쥰이 방문에 기대어 서있다.


 "……잘 잤어요?"
 "어."
 "그럼 더 자지."
 "……."
 "……미안."


 민망하게도 담배는 혼자서도 잘만 탔다. 얼른 담뱃불을 껐는데 마지막 연기가 짙게 피어올랐다. 문도 안 열고 피워서 그런지 공기가 흐렸다. 덕분에 그 무서운 얼굴이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차마 눈은 못 마주치고 괜히 시계를 한 번 보는데 또 그 시선을 연기 사이로 집요하게 뚫고 따라온다. 그래서 눈으로 술래잡기 하다가 결국 잡힌 것같은 모양새가 됐다. 화난 얼굴이라서 웃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누이는 시선을 잡혀 있는데, 사실 쥰은 누이의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거, 뭐야?"


 그렇게 말하고 그걸 듣는 동안에도 '그게' 뭔지 둘 다 알아차리질 못했다. 환타지아요, 그걸 들으려고 요구한 질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연기가 사그라들면서 쥰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누이는 순간 제가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화난 얼굴이 아니라, ……이상한 얼굴?


 "왜 그래요?"


 쥰은 누이의 시선이 아닌 제 앞을 둥실 떠다니는 연기를 눈으로 붙잡고 있었다. 코에서는 여태까지 누이가 먹었던 사탕을 다 합쳐놓기라도 한 것 같은 달큰한 냄새가 느껴졌다. 담배 냄새는 그저 그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연기는 교체한지 얼마 되지 않아 눈 아프게 빛나는 형광등 아래에서 흐트러지듯 공기에 희석되더니, 이내 연기 뒤에 있던 누이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그제야 장애물 없이 시선이 마주친다. ……이상한 얼굴.


 "보여, 무지개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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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turn

 안녕, 그러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당신의 연인이에요. 누이.

 그러고 보니까, 내가 쥰에게 긴 말을 건넨지 꽤 됐더라구요. 습관처럼 말하는 보고 싶어요 좋아해요 그런 말 말고 ―물론 전부 빠짐없이 진심이지만― 정제하고 닦아내서 예쁘게 내어 놓은 유리알 같은 말 말이에요. 사실 가끔씩 생각해봤는데…… 어려웠어요. 얼굴 보면서, 그냥 말로 마주하면서 하는 말들은 그렇게도 가볍게 퐁 하고 비눗방울처럼 잘만 터져나오는데, 그저 어디 조용한 곳에 앉아서 쥰에 대해 생각하면서 단어를 고르려니 이상하게도 내 언어들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어요. 표현이 부족한게 아니라 표현할 말들이 전부 도망치기라도 한듯이.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기억보다는 상상처럼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을 정확히 짚어내려고 할 때마다 내 눈 앞에 섬광이 스쳐갔어요. 아주 밝아서 눈을 감아버리게 만드는 그런 빛이.

 그래서 지금은, 어떤 곡을 들으며 조금 느리게 말을 구성해가고 있는데. 이 곡은 아마 지금 쥰도 듣고 있겠죠? 난 이제 어떤 음색이든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쥰을 떠올려요. 쥰이 연주하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자꾸 돌아보게 돼요. 분명히 서로 다른데도 당신이 묻어나와요. 피아노 소리 말고도, 나와 딱 10cm 차이나는 키나, 민트향 가득한 아이스크림, 길거리에서 훅 끼쳐오는 담배 냄새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전부. ……나열하려면 끝도 없겠네요.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섬광과 비슷해요.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번쩍하고는 사라져서 내가 계속 돌아보게 만들어요. 마치 그 자리에 쥰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난 그럴 때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만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요.
 세 달 전까지만 해도 내겐 그저 보통 날이었던 오늘 날짜도 그래요.

 서론이 너무 길었나, 그 정도는 이해해줄래요? 내겐 찬찬히 설명할 말들이 필요했어요. 쥰에게는 물론 나에게도. 스스로 왜 그런 섬광을 자꾸만 보게 되는지, 그 빛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쥰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난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유독 반짝거리는 오늘 하루를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쥰이 태어난 19번째 날이 이렇게나 빛난다고.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렇게 사방에서 반짝거리며 곁을 스쳐가는데 쥰 얼굴은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걸까요? 스스럼없이 눈빛을 맞추고 손을 잡고 향기를 맡는 그 시간들이 때로는 너무 새삼스럽고 신기해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뜨겁던 여름이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이제 겨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계절이 오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일상이 되었다는게. 난 기적을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이 다음, 그 다음, 끝이 없을 그 끝까지 같이 섬광을 마주하고 싶어요. ―비록 당신에게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눈부시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럴 때면 이상할 정도로 또렷한 쥰을 마주보면서. 스치는 빛이 아닌 그 자리에 있다고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어요. 혹여 내가 빛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생일 축하해요, 이 여섯 글자로 대신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아쉬워서. 좀 길었나요? 그래도 선물이라고 생각해줘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이 훨씬 많았나봐요. 유리알 같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만 줄일게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좋아해요.

Return_To_Eden.wma
3.3 MB



11/21, 쥰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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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세계관


1. 쥰(24살)과 누이(23살)는 평행세계에 살고 있음
2. 둘은 평행세계 속 같은 집에 같은 날에 이사함
3. 이 집을 통해 둘의 세계가 자꾸 겹치고, 혼돈됨
4. 둘은 완전히 같은 가구를 사용함
5. 일부 같은 소품이 있음 (주로 이것들이 뒤바뀜) 비슷한 소품도 때로 뒤바뀜



* 누이는 꽃병에 계속 생화를 사다가 꽂아놓는데, 쥰이 그걸 발견한 것부터 시작.


* 둘의 집에는 오래된 피아노가 있음. 누이는 그저 엄마가 쓰던 거라 가지고 있을 뿐 치진 않음. 그런데 쥰이 피아노를 치면 그 소리가 피아노에서 울림


* 시간상 쥰이 먼저 씻고 직후 누이가 욕실에 들어가면 욕실이 젖어 있음.


* 쥰이 전자레인지를 돌려 놓은 알람을 누이가 들음.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전자레인지가 돌아가고 있었음.


* 도둑이 있거나 스토커가 있나 싶어서 경찰을 부르기도 해보고 임시 CCTV도 설치해봤지만 소용없었음. 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남.


* 둘이 동시간대에 욕조에 입욕제를 풀고 목욕하는데, 동시에 물에 잠겼다 나오는 순간 서로의 입욕제(누이 : 벚꽃향이 나는 분홍색, 쥰 : 바닐라향 나는 흰색)가 뒤바뀜. 향도 다르게 남


* 완전히 똑같은 컵이 하나 있음. 둘 다 테이블에 놔뒀다가 누이가 돌아서면서 실수로 팔로 밀어서 떨어뜨림. 그런데 쥰 쪽의 컵이 떨어져 깨지고 누이의 컵은 멀쩡함.(이때 겹쳤던 컵이 하나만 남아버림)


* 담배를 피우면 재떨이에 털지도 않은 재가 쌓여 있고, 거의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잠시 놓으면 서로 뒤바뀜(누이 : 팔리아멘트 라이트, 쥰 : 버지니아 슬림 레드)


* 누이는 일기장에 이상하거나 바뀐 점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쥰은 비어있는 벽(누이 쪽에서는 사진을 붙이거나 간단한 게시판으로 씀)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기록하기 시작함


* 누이의 기록


피아노를 치고, (중략) 똑같은 컵이 있고 담배는 버지니아 슬림, 단 커피를 좋아하고 비누는 바닐라향...


* 쥰의 기록


꽃을 조금 꺾어서 마른 상태로 벽에 붙이고, 담배 꽁초의 필터만 잘라 남겨서 옆에 팔리아멘트라고 쓴 포스트잇과 함께 붙여두고 깨진 컵은 사진으로 찍어 붙여놓는 등 실물 위주의 기록들.


* 쥰이 기록들을 보면서 고민하다가 문득 벽 한가운데에 볼펜으로 물음표를 씀. 누이는 게시판으로 쓰던 벽에서 사진들 한가운데에 물음표가 써있는 걸 보고 놀라서 일어났는데 이때 의자가 넘어짐. 그리고 쥰 뒤에 있던 의자도 넘어짐


* 누이는 피아노를 치진 않고 관리만 가끔 해주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조율하려고 조율사를 불렀더니 이미 조율이 완벽하게 돼있다고 함.


* 쥰이 안 쓰고 책장 구석에 처박아뒀던 빈 노트가 책상 위에 놓여있음. 이 노트에 누이가 일기를 씀


* "이 집에 여기에 없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 담배 피울 때 서로 재떨이 먼저 안 치우려고 마냥 노려보며 냅둠


* 욕실이 씻기도 전에 젖어있으니 처음엔 서로 먼저 씻으려고 기를 쓰다가 결국은 시간대를 서로 맞추게 됨. 자고 일어나는 시간 등 생활하는 패턴이 점점 비슷해져감


* 자기 것이 아닌 음식을 먹어버리면 다시 채워놓기도 함


누이 : (아 바닐라라떼다, 이건 마실래)(마셔버림)
쥰 : (...마셨군...)
누이 : (대신 집에 있던 아메리카노에 설탕 잔뜩 부어서 있던 자리에 다시 놓음)
쥰 : (한숨)(설탕을 얼마나 넣은 거야)


* 누이가 꽃을 사러갈 때마다 무슨 꽃을 좋아할지 고민함. 쥰이 기록하려고 안개꽃을 조금 꺾었을 때 꽃이 꺾인 걸 알고 항상 안개꽃을 섞어서 꽃을 장식함


* 서로 대화는 못하는데 가끔 허공에다 대고 한 마디 하기도 함. 누이가 외출하고 돌아올 때 갑자기 현관에서 바깥바람 들어온 걸 느끼고 쥰이 피식 웃으면서 왔냐, 하고 말함


* 둘이 신발이 바뀜. 같은 색 같은 스니커즈였는데 사이즈만 다름. 누이는 여기서 쥰이 남자란 걸 눈치챔. 신발은 누이는 신발장 안에 소중히 싸서, 쥰은 항상 보이는 현관 안쪽에 가지런히 보관함.


* 한쪽에만 남았던 컵을 다시 떨어뜨림, 그리고 그 컵을 누군가 붙잡음. 그때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치면서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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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꽃을 꺾어본 건 9살 여름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여름의 끝물인지 가을의 첫물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방학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여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기억하고 있는 여름이 채 다섯 번 밖에 되지 않는 나에게 한창 울창하게 뻗은 나무들은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눈이 아픈 초록색이라고 아파트 정원을 오가며 생각했다. 실상은 가열차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아팠던 거였겠지만.
 눈을 아프게 만드는 나무 아래엔 철쭉이 색색으로 뭉쳐 피어 있었다. 봄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철쭉들은 진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 보일 정도로 오랫동안 시드는 기색 없이 선명했다. 몇몇 아이들은 꽃의 꿀을 먹는다며 꽃을 따서 끝부분을 빨아제끼기도 했고 ―철쭉에는 독이 있다는 걸 안 건 사춘기가 막 지날 무렵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벌이 꼬이는 꽃무리를 싫어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꽃들이 얼마나 싱싱하고 예쁜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 지켜보거나 그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나는 꽃에 관심이 없었다. 이미 몇 달 째 똑같은 꽃들을 한 번도 깊게 들여다보거나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꽃, 정원을 장식하는 도구.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더 이상의 무언가를 찾을 수 없는. 그게 내 인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꽃이 시든 것을 보았다. 여전히 나무는 울창했다.

 아마 어딘가에 다녀오던 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몇 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해는 나무의 끄트머리보다도 더 낮은 곳에 내려와 있었다. 내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빛에 극단적으로 양분된 진분홍빛 철쭉이 내 시선을 억지로 잡아 끌듯 가져갔다. 꽃은 시들어서 꽃잎이 주름져 검게 말려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전부 시들어버릴 것 같았다. 연한 주홍빛 햇빛이 겹쳐 색은 더욱 선명한데 이미 힘없이 말려들어가버린 꽃잎은 더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나는 쭈그려 앉아 그 꽃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때의 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렇게 망가진 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일어나 그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내게 꽃을 꺾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유치원 선생님도, 학교 선생님도 모두 꽃을 꺾지 말고 보라고 가르쳤다. 나는 배운 대로 꽃을 꺾지 않았다. 다들 봄에 벚꽃 구경을 가서 작은 벚꽃 가지 하나를 꺾어 머리에 꽂거나 손에 들고 사진을 찍을 때도 나는 그저 나무 밑동에 서기만 했다. 보드라운 토끼풀을 꺾어다가 꽃반지를 만드는 놀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수목원에 가 허브 잎을 따 볼 기회가 생겼을 때도 난 만지지조차 않았다. 꽃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보면 예쁘고 만지면 보드라운 것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없었다. 난 엄마와 선생님들과 어른들의 말을 어겨 가며 그걸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꺾은 꽃이 다 시든 철쭉이란 걸 되새겨놓고 조금은 속상해했다. 보조 열쇠로 집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을 때까지.


 "엄마를 따라갈래, 아빠를 따라갈래? 결정은 네가 하렴."


 엄마는 피곤한 눈빛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엄마가 그 자리에서 한 번만 더 물어봤다면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저 그렇게 양자택일을 9살 짜리 딸에게 떠넘겨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빠는 집에 없는 게 확실했다. 그 무렵의 나는 이미 현관을 보고 집에 사람이 누가 있는지 익숙하게 읽어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아빠는 집에 자주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엄마 것이라는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엄마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은 건, 내가 그 순간 바로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혼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벌써 신경질이 한 김 나 있는 엄마에게 그런 걸 알려줘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처음 꺾어온 철쭉을 책상 구석에 얌전히 두었다.
 나는 다음날 저녁을 먹으며 엄마한테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별 반응이 없는 듯 하다가, 식사를 다 하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 나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아빠는 여전히 집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전에 나는 그 꽃을 다시 꺼냈다. 가까이서 살필 필요도 없이 이미 거무죽죽하게 꽃잎이 다 시들어서 이제 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선명한 색도 끝이 없을 것처럼 싱싱하던 꽃잎도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꽃을 오래 살펴보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불을 껐다.

 그게 끝이었다.
 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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