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이었다. 첫눈은 이미 한참 전에 온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머지 않아 채 녹지도 못한 더러운 눈 위로 질척거리는 비가 내렸다. 비였다가, 다시 눈이었다가, 이내는 진눈깨비가 되었다. 마를 날 없을 것처럼 구는 하늘은 성에 낀 창문처럼 희끄무레했다. 볼은 얼어 따갑고 손끝은 감각이 없었다. 교복 위에 겹쳐 입은 외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의 폭과 반경이 좁아졌다. 발걸음 옮기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사실은 귀찮은 계절. 그 귀찮음이야말로 겨울이었다. 한 겨울.
그리도 귀찮은 계절에, 이치하라 누이가 사람을 죽인다.
당신 앞의 살인자
1. One Day
아니, 이미 죽였다.
누이의 시야는 오로지 텅 빈 하늘로 꽉 차있다. 보기만 해도 손끝이 시려오는 철제 난간만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굳이 내려다 볼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머리가 깨지고 온 몸이 기괴하게 비틀려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텐데 누이는 그런 걸 전혀 못 보는 성정이었다. B급 공포영화에서 피가 튀는 식상한 장면조차 견디지 못하는 비위를 가지고 있는데 화면이 아닌 진짜를 볼 수 있을리가 없지. 문득 생각의 연쇄를 타고, 눈 가리고 겨우 봤던 그 피 튀기는 장면이 떠올랐다. 피 튀긴다고는 해도 이제 거의 잊어버려서 떠올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느낌이었더라, 시뻘겋고, 찐득거리고, 더럽고, 역겨웠지.
이치하라 누이가 그렇게 사람을 죽였다.
사실 보질 않았으니 진짜로 그렇게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이프로 난도질 당하는 것과 5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비슷한 죽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죽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모습이든 죽음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이고, 이번에는 그 죽음을 누이가 만들었다. 죽음을 만든 사람, 죽인 사람, 그래, 살인자. 살인자다.
이치하라 누이는 이 순간부터, 아니, 그 손을 놓았을 때부터 살인자이다.
살인자라는 단어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그 3분 이후 누이가 스스로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순간은, 다부진 발걸음으로 두어 걸음 척척 걸어가 차갑고 딱딱한 난간을 ―착각인지 현실인지 모를 미온이 남은― 손으로 꽉 쥐고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이다. 단순히 비위가 약하다는 이유로 보지 않을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자마자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닥을 느리게 흘러가는 피의 양을 눈대중으로 어렴풋이 가늠해보는 동안 비위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감지도 못한 눈동자가 흐린 하늘을 향해 있다. 마지막으로 본 하늘이 저따위라니. 누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우 그치나 싶었던 진눈깨비가 지금 당장 내리기라도 할 듯했다. 누이는 다시 시체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비하면 눈이 아프게 느껴질 정도의 선명하고 진득한 붉은 색, 눈을 깜빡였다.
그도 눈을 깜빡였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넥타이의 색깔은 짙은 초록색, 3학년. 누이의 목에는 저 피보다 밝은 빛의 리본이 매어져 있다. 누이는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이목구비가 정확히 보이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깜빡.
눈이 마주쳤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눈이 깜빡이는 걸 알아봤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제 눈이 깜빡이는 걸 잘못 알았거나. 하지만 누이는 그 깜빡임 사이에 묘한 금이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벽이 벌어진 틈에서 시멘트 모래가 파스스 떨어지는 듯한, 건조한 시선의 연결. 그는 누이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시체로부터는 채 열 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시체에서 흐른 피는 그의 발치를 향한 방향으로 스며들고 있다.
문득 눈앞에 굵은 눈송이 하나가 휘날려 떨어져갔다.
누이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러나 시선은 고정한 채로 천천히 물러섰다. 금방 그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앞에 흘려졌던 눈송이는 그와 가까운 곳 어딘가에 떨어졌을 것이다. 혹은 시체 위로 내려앉아 핏물에 녹아내렸거나. 누이의 코끝과 발등에도 눈송이가 하나씩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금세 녹아버렸다. 공기가 얼어붙은 듯 사방은 고요하다. 눈송이에게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뺨이 따가웠다.
누이는 옥상에서 도망쳤다.
2. The Day
소문은 누이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또다른 것들 중 하나였다.
수없는 소문이 귀를 찔러댔다. 어차피 남들에게 다 들릴 걸 알면서도 의미없이 낮게 내려깐 목소리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단어들. 누이는 참지 못하고 교실을 나섰지만 당연히 학교 안에서 사람을 없는 곳을 찾는게 더 힘들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손을 씻고 있으니 거울에 소리가 반사되는 것 같았다. 물을 사방에 다 튈 정도로 세게 틀어놓으니 치맛자락이 젖었다.
그래서, 걔 뭐래?
근데 자살하겠다고 원래도 존나 나댔잖아. 누가 진짜 죽겠다고 생각하냐.
좀 불쌍하긴 하다. 또라이같긴 했는데…….
걔 우울증 있었대. 자살하겠다고 한 것도 다 우울증 때문이라고.
결국 수업 종이 치고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을 때, 누이는 화장실 구석 칸에서 토할 수밖에 없었다. 비위가 극도로 상한 탓이었다. 먹은 것도 없어 나오는 것도 없었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위액인지 침인지조차 모를 것만 꾸역꾸역 뱉어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입에서 비린내가 났다. 한 차례 입을 헹구고는 이미 수업이 시작된 교실을 뒤로 하고 양호실로 갔다. 웬일인지 확인증조차 받지 않고 바로 침대를 내어 주었다. 손수 이불을 펴 주는 양호 선생의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양호실은 따뜻했고, 이불까지 덮으니 금방 잠이 왔다.
깜빡.
눈을 떴을 때 양호 선생은 잠시 나갔는지 없었다. 30분 남짓의 얕은 잠이었는데도 개운했다. 누이는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놓고, 양호 일지까지 기록한 후 다시 교실로 향했다. 복도로 가던 중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교실에서 다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발걸음이 가뿐했다.
다시 그 아이를 죽이는 꿈을 꾼 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붉은 꿈.
청소 시간은 급히 끝났고, 이내 종례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착실히 자리에 앉아 담임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 명도 자리에서 빠지지 않은게 드물다 싶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담임 선생이 들어왔다. 그는 묵직한 눈빛에 굳게 다문 입을 잠시 깨물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문을 말하는, 낮은 목소리. 다시 귓가에서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조문을 가고 싶은 아이들은 주소를 알려주마.
그것으로, 종례는 끝이었다.
3. That Day
누이는 조문을 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다. 누군가가 살인자라며 자신의 목을 잡아챌까봐.
그리고 그런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암묵적으로 아이는 자살한 것으로 결론난 모양이었다. 자살하고 싶다는 메시지 기록은 차고 넘쳤다. 요즘 방에서 나오는 법도 없고 대화한 적도 없었다는 부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는 몇몇 가까웠던 아이들의 증언과 아이의 교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분실되었던 옥상 열쇠, 중앙 계단에 설치된 CCTV에서 발견된 혼자 옥상을 올라가는 장면까지. 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은 1학년 남학생이었다. 시체의 목격자는 시체가 이송될 때까지 그 주위에 몰려들어 있던 학생들 전부였다. 눈이 조금 쌓여 일시적으로 피가 하얗게 덮였던 블록은 다음 날 바로 교체되었다.
자살한 아이의 장례식이라는 이유로 2일장으로 치뤄진 장례에는 아이의 생전 친구들과 선생들이 조문을 갔다. 살아있을 적엔 손에 꼽는 문제아로 꽤나 손가락질 받았던 아이는 많은 사람들의 추모와 애도를 받고 갔다. 부모는 여전히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두어번 실신했다며 장례식에 다녀온 아이들이 말했다. 다들 죽은 아이를 불쌍히 여겼고, 자살했다는 것을 속으로는 섬짓하게 느꼈다. 한동안 학교는 물에 침잠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도 이치하라 누이를 살인자라고 지목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그 아이는 확실히 꼼꼼했던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는 누이가 조달해주던 물건들을 항상 학교에 두었다. 누이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집에 흔적을 남기는 것에 비하면 학교에 남긴 흔적은 훨씬 치우기 쉬웠다. 누이는 아이의 사물함 비밀 번호를 알고 있었고, 아직 남아 있던 물건들을 몽땅 수거했다. 부모는 부검을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약물의 흔적 따위가 남아있는지 아닌지는 이제 알 도리가 없다. 아이는 화장되어 고운 뼛가루로 납골당에 안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기적이라고 표현하려면 다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하지만 기적에 가까웠다. 누이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는 습관이 들어 있었고, 후관은 건물이 낙후되어 서쪽에는 복도 끝 CCTV 외에는 다른 CCTV가 없었다. 아이의 마약 중독 증세는 신기할 정도로 우울증과 닮아 있었다. 뭐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아이의 습관도 그랬다. 통화기록 어디에도 누이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누이는 아이와 얼굴을 맞대거나 둘이 직접 주고받는 쪽지로만 이야기했다. 그 철저함이 이런 곳까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구역질이 났다. 누이는 장례식이 끝난 후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말하자면 누이가 의심받을 구석조차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3학년은 2학년보다 종례가 늦었다. 누이는 그가 자습을 하진 않을까 싶어서 3학년 복도에서 죽치고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종례가 시작되기도 전에 반을 나섰다. 자기보다 얼핏 10cm는 더 큰 키에,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너무 선명한 그 지루한 얼굴을 금방 알아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눈이 마주쳤든 말든 누이를 지나쳐 걸었다. 누이는 저보다 반 걸음은 더 큰 보폭을 일정한 간격을 놓고 쫓아갔다. 그리고 본관 건물을 나섰을 때, 그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깜빡, 눈이 한 번 깜빡였다.
"왜 말 안 했어요."
"내가?" "봤잖아, 내가 죽인 거."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의 말투는 그가 하고 있는 눈빛만큼이나 지루하고 느렸다. 1학년과 2학년은 이미 하교했고, 3학년은 아직 종례가 끝나지 않아 사방은 고요했다. 그날처럼. 누이는 가벼운 무게로 말을 이었다. 그 역시 별 것 아니라는 듯 짧게 대답했다.
"끝까지 모른 척 해줄 거 아니면," "뭘." "그냥 지금 가서 말해줘요." "그러니까 뭘." "내가 도망치기 전에."
겨울 해는 당연하다는 듯 일찍 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빠른 속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순간 그 앞에 하얀 것이 스쳤는데 그게 번뜩이는 빛인지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누이가 그 하얀색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는 처음으로 길게 말했다.
"뭘 얘기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럼 네가 직접 자백해."
누이는 간만에 소문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스친 것은 정말로 눈이었던 모양인지 정수리에 무언가가 차게 닿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니 완전한 눈이 아닌 진눈깨비였다. 차가운 물방울이 묻어난 손끝을 치마에 터는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복 바지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일순간 교내에서 잘도 그런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생각이었다.
"난 비겁해서 자백은 못하거든." "그럼 나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요?" "모르겠는데."
소문을 말하지 않는 대신 완전히 말이 안 통한다. 누이는 약간 학을 떼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끝까지 모른 척 해줄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하얀 담배연기를 뱉었다. 연기는 진눈깨비와 탁한 겨울의 공기색과 섞여 허공에 짙고 진득하게 감겨들었다. 누이는 참을성있게 기다렸고, 그 연기가 겨우 바람에 휩쓸려 흩어질 즈음에야 그가 다시 말했다.
"난 성가신 건 질색이야."
누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손에 든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곤 제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도 피워?" "잠깐 피우다 끊었었어요. 냄새를 숨길 수가 없어서."
그 질문은 좀 바보같았다.
어쨌든 어느 쪽도 학교 안에서 할 짓은 아니지. 흡연과, 살인. 누이는 학교에서 하면 안 되는 짓들을 더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리곤 담배를 두어 모금 피우고는 다시 건넸다. 그는 받지 않았다. 누이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시 담배를 물며 말했다.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안 믿을게요." "……." "좋을 대로 하세요."
깜빡. 확실히 그의 눈이었다.
누이는 반 정도 태운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이제 슬슬 3학년들이 나타날 시간이다. 본관 창에 비치는 그림자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저리도 흐릿한 그림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있는데, 왜 아이가 죽은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할까요. 누이는 굳이 입으로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그랬듯이. 문득 그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마키하라 쥰. 파스스 부서지는 금과 같은 눈빛을 가진, 혹은 그런 눈빛을 짓게 만드는. 아니, 어쩌면 누이 때문에 그런 눈빛을 짓게 된.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이는 반 정도는 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이는 살인자고, 그는 목격자니까. 시체의 목격자 말고, 살인의 목격자. 유일한 목격자.
이윽고 알고 있던 대로 3학년이 하나 둘 본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누이는 그날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앞에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