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것은
욕망과 허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




*


 마음은, 그대로 남았다.
 마음은, 태어나자마자 혼자가 되었다.



*



 마음은 오랫동안 슬퍼하며 하얀 모래와 검은 하늘만이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을 떠돌았다.
 마음은 자신이 어째서 생겼는지, 어디로부터 생겼는지, 왜 혼자 버려졌는지 알고 싶었지만 잠잠하고 황량한 사막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이따금 모래 사이로 보이는 하얀 뼛조각들은 살아있는 듯 움직이긴 했지만 마음과 전혀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마음은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워 울고 싶었지만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마음인 자신을 가져 대신 울어줄 만한 것이 사막에는 없었다.
 마음은 바람이 부는 대로, 모래가 날리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았다. 사막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어 어디로 가든 똑같은 광경이었다. 마음은 힘겨웠다. 마음은 태어난 이래로 쭉 지쳐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을 홀로 떠도는 공허함과 강렬한 허무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어느 날 지칠대로 지친 마음 앞에 반짝이고 괴상하게 휘고 겉껍질이 바스라진 나무 덤불이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어딘지 익숙한 기분이 든 마음은 그 아래에 기대어 누웠다. 그곳은 사막의 다른 곳보다는 조금 더 편안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그 반짝거림이 마음에게 조금 위안을 주었다. 마음은 잠시 쉬기로 했다. 이제껏 걸어다닌 시간과 거리를 셀 수조차 없었다. 마음은 휴식이 필요했다.



*



 이윽고 마음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마음은, 하얗고 검은 어떤 것이었다.
 꿈에서 마음은 손도 있었고 발도 있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눈도 있었다. 마음은 그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생겼지만 그래도 마음이 있는 곳은 사막이란 건 변하지 않았다.
 마음은 자신이 기대었던 덤불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잠들기 전의 풍경과 똑같았지만 마음은 이것이 꿈임을 알고 있었다. 꿈은 무척이나 생생하고, 또 생생한 만큼 허무했다. 깨어있을 때의 허무함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발이 신기해서 마음은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발이 모래에 빠지며 부드럽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겁을 먹은 마음은 한동안 그렇게 발이 더 빠지진 않을지 지켜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발이 더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음의 발가락 사이로 하얀 모래들이 달라붙었다. 
 마음은 걸으면서 이따금 손으로 모래를 쓸어보거나, 불어오는 바람을 한껏 들이쉬어 보았다. 숨이란 것은 걸음보다도 신기한 것이었다. 숨은 끊임없이 마음의 목과 가슴을 간지럽히며 마음이 살아있음을 각인시켰다. 손으로 모래를 조금 퍼서 그 위에 숨을 내쉬면 마치 사막의 바람처럼 모래가 날렸다. 마음은 자신이 불어낸 바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계속 걸었다.



*



 마음은 곧 꿈이 언제 깰지 알 수 없어 불안해졌다.
 어느새 반짝거리는 덤불은 돌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은 자신이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어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자신과 같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는 누군가를. 그러려면 한시라도 빨리 이 삭막하고 불행한 사막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닌 사막이 그랬듯이 꿈 속의 사막 역시 끝이 없었고 너무 작은 마음의 걸음으로써는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마음은 결국 꿈에서조차 지쳐갔다. 발가락을 파고든 모래가 따갑게 자신을 찔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마음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마음은 한편으로, 자신이 울 수 있다는 그 사실조차 생경하게 행복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



*



 마음은 그런 하늘은 처음 보았다.
 마음은 처음으로 놀랐다.
 걷고 걷는데, 마음의 앞에 갑자기 하늘이 쩌억 하고 사나운 아가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마음은 놀라서 주저앉았다. 벌어진 하늘은 마치 마음을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그 검은 그림자를 크게 드리웠다. 마음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 그 아가리 사이에서 혹시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오진 않을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도 들었다.
 마음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 하늘이 무언가 뱉어내길, 혹은 그 하늘 자체가 무언가가 되어주길 얌전히 기다렸다. 마음은 이 거대한 하늘의 아가리를 만나기 전까지 꿈이든 꿈이 아니든 걷고 걷고 걷고 또 걷고 걸었으므로, 적어도 자신이 걸어온 만큼은 기다릴 수 있었다. 꿈에서 깨지만 않는다면.
 마음은 초조해졌다. 이제서야 무언가 만날지도 모르는데, 꿈에서 깨어날 수는 없었다. 마음은 이대로 깨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마음은 이를 악물고 간절하게 소망했다. 소망하는 것은 걷는 것 다음으로 마음이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



 마음은 꿈에서 깨어났다.
 마음은 절망했다.
 마음은 여전히 반짝거리는 나무 덤불 아래에 누워 있었다. 마음은 여전히 손도 발도 눈도 없었고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마음은 눈을 깜빡일 수도 모래를 퍼낼 수도 발을 찌르는 모래의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눈물도 당연히 흘릴 수 없었다. 눈물로 흘려보낼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마음을 아주 거세게 짓눌러왔다. 하늘의 아가리와 검은 그림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마음은 더이상 사막을 떠돌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꿈이 너무나 행복하고 생생해서 마음은 그 꿈이 아닌 곳에선 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마음은 이윽고 자신을 낳아 놓고 사라진 어떤 것을 강렬히 증오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 황량하고 외로운 사막에 내버려두고 사라져버린 어떤 것.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알 수 없는 것을 원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마음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괴로움에 사로잡힌 마음의 곁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



 소녀에게도 모래바람은 불어왔다. 시야가 흐려져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소녀는 손으로 가만히 모래를 쓸어 보았다.
 소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뻣뻣하게 만드는 그 모래바람을 느꼈다.




*



 소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걷기 시작했다.
 소녀는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소녀는 자신을 구해주었던 친구들과 함께, 자신이 납치되었던 이 사막을 구하러 돌아온 참이었다. 사막은 자신의 기억과 다르지 않게 하얗고 까맣고 건조하고 허무했다. 소녀가 사는 세상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감정이 이곳엔 가득했다. 황량한 바람이 소녀의 머리를 계속 헝클어뜨렸다. 소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거나 바람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사막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기억 속에, 명확하지 않고 희뿌연 모래바람처럼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소녀의 발을 잠시 멈추게 한 그 기억은 좀처럼 잘 떠오르지 않았다. 소녀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날리는 모래바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광활한 사막, 거대하고 단단한 벽과 가짜 하늘로 가득 찬 기억을 조심스레 뒤집어 보았다. 소녀 자신과, 이 사막, 그 간극에 서 있던 단 하나의……



 "마음……?"



 하얀 모래바람이 줄곧 휘몰아쳤다.



*



 마음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은 지금 소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소녀는 희고 검기만 한 사막에서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 색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카락, 눈, 피부, 입술 모두 다 다른 색이었다. 마음은 그 색에서 온도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 보았다. 온도는 따뜻하고, 잔잔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마음은 소녀를 만지지 않아도 그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또한 그림자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여지껏 보아온 그림자와는 달리, 소녀의 그림자에는 빛이 남아있었고 유동적이었다. 소녀가 입술을 달싹이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도 있었다. 마음은 그 그림자를 가만히 좇았다. 소녀는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숨결이 모래바람 사이를 헤치고 마음에게 불어 왔다. 마음이 쉬었던 숨과는 달리 뜨겁고 축축하고 무거우면서도 다정한 숨이었다. 
 생기, 살아있는 것. 소녀는 무척이나 강렬한 숨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은 그 숨을 함께 쉴 순 없었고, 소녀에게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소녀는 마음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마음은 자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또다른 마음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대로 대화나 소통은 전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슬프지 않았다. 마음은 이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이 소녀를 바라보며 이 숨의 온도와 소녀가 가진 찬란하고 선명한 색을 영원히 되새기고 싶었다. 마음은, 영원하길 바랬다.



*



 소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소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왜 자신이 마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란 단 두 글자에, 순간 소녀를 스쳐가는 어느 바람이 있었다. 사막의 까끌거리는 모래바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좀 더 따뜻하고, 생기가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 가득히 서식하는 마음 없는 생물들의 것이 아닌,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자로부터 나온 '숨결'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숨결을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소녀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들은 잠시 걸음을 멈춘 소녀와 약간 떨어져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느낀 걸까. 아니면 이 바람이 너무나 익숙해서 그렇게 느껴졌던 걸까. 잘 모르겠다. 소녀는 이미 서있던 자리를 등지고 친구들과 함께 다른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하얀 모래바람이 뺨을 쳤다. 푹푹 빠지는 발과 목이 아프도록 건조한 공기는 소녀에게 방금 전의 따뜻한 숨결을 곧 잊어버리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문득 다시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찬찬히, 손을 앞으로 조심스레 뻗어 보았다.
 그리곤 바람 사이를 휘젓다가 다시 당겨 보았다.
 그런 소녀를 친구들이 의아하단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소녀는 아랑곳않고 다시 중얼거렸다.



 "마음."



 검은 먼지가 손끝에 묻어 나와 있었다.




*



 내가 무서운가, 여자.
 무섭지 않아요.
 그렇군.
 ……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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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던 건 여름이 채 오지도 않았는데 열대야가 시작된 밤이었다.

 

- ……걔가 몇 살인데 벌써 죽어?

- 교통사고래.

 

그와 내가 스물네 살 때 일이었다.

 

장례식 날에는 결국 완연한 여름이 되어 있었다. 나무들은 푸르렀고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는 지독히도 더운 날씨에 불구덩이에 들어가야 하는구나.

생전 그가 여름을 좋아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여름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선 눅눅한 땀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피운 향 냄새와 수많은 흰 국화 향기와 음식 냄새가 처음부터 하나였던 마냥 한데 섞여있는 가운데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도 더위는 사람들의 그림자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듯했다.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들 무의식적으로 불쾌해하고 있었다. 젊은 청년의 장례식답게 안타깝고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한숨을 쉬고 두 번 절을 하고 꽃을 놓고 앉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짧은 대화를 하는 그 일련의 과정 후 사람들은 잰걸음으로 귀가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몇 시간이고 앉아 너무 일찍 죽어버린 그를 위해 울거나 슬픔에 빠져 넋 나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음울하고 습한 분위기 속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의 영정 사진이었다.

대학 동기들이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 사진만 쳐다보았다. 유일하게 여기서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하얀 국화와 검은 액자에 파묻혀 아이러니하게도 조문객들의 슬픔을 자극했다. 나는 어쩐지 미묘한 감을 느꼈다. 언제 찍었는지 모를 그의 사진이, 더위와 함께 이곳의 분위기를 한층 더 작위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 넌 벌써 가게?

- 더 있어봐야 뭐 하겠어.

 

결국 나도 오래 있지 못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떠나진 않았다. 건물을 돌아 사람이 없는 그늘로 피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밖은 안보다도 더 덥고 습했지만 오히려 견딜 만 했다. 그의 영정 사진보다는 담배 한 개비가 더 생전 그를 떠올리기 쉽기도 했다.

그는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항상 내가 불을 붙이면 얼른 뺏어 자신이 피우곤 했다.

 

- 예쁜 사람은 담배 피우는 거 아니야.

- 간접흡연은 더 나쁜데?

그러니까 다음부턴 피우지 마.

 

그렇게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날 예쁜 사람이라고 불러주던 때가 있었다.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어린 티를 벗으려고 발버둥 치며 애를 쓰고 있었다. 주위도 비슷했다. 애 취급은 지긋지긋했고 어떻게 해서든 내가 어른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다. 담배에 손을 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어른이든 애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차분했고, 가라앉아 있었다. 한 달은 집에만 있었던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고 대조적으로 머리카락은 검었다.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몸짓은 느긋했다. 그는 스무 살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색과는 다르게 흐릿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그를 강렬하게 만들어주는 게 있었다.

그의 눈은 항상 웃는 듯 아닌 듯 곱게 접혀 있었다. 웃는 눈. 나는 이상하다는 듯 그에게 묻곤 했다.

 

- 넌 원래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 웃어줘?

 

그거였던 것 같다. 그에게 반했던 이유. 온갖 백색 수식어를 그에게 다 바치고 싶을 정도로, 갓 스물 살을 맞은 그는 하얗고 아름다웠다.

이제는 한참 지나간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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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에 산책을 나선 참이었다. 봄중에도 항상 밤공기는 찼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미적지근해져 조금 답답했다. 늦봄, 혹은 초여름. 계절을 딱히 정해 부를 수 없는 날이었다.

 마당은 고요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낮에는 한껏 어리고 푸르렀던 잎들도 어두운 달빛이 비추어지니 아직 연약하고 힘이 없었다. 밤이슬도 잘 맺혀 있지 않으니 허전했다. 하지만 아마 조금만 날이 지나면 훨씬 싱싱해져서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푸르를 것이다. 그는 천천히 나무들을 지나쳤다. 곧 구름이 달빛을 가려 전보다도 더 어두워졌다. 시중인들도 이미 다 잠자리에 들었는지 밤에 가끔씩 들리던 부산스럽게 일을 마무리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난히 조용한 풍경이 이내 조금은 지루해져서 그는 그만 들어갈 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느린 발소리가 낮게 울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림자진 자리만 좇아갔다. 시선을 통제하지 않고 걷는 것이 그에게는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조그맣고 동그랗게 떨어진 무언가가 보였다. 꽃잎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꽃잎이 다 진 매화나무가 들어왔다.

 붉고 동그란 꽃잎은 매화나무 가까이에 훨씬 많이 흩어진 채였다. 일찍 피어서 그런지 다른 꽃나무들보다도 훨씬 일찍 진 모양이었다. 그중에도 여즉 떨어지지 않고 겨우 나무를 붙들고 있는 꽃이 딱 한 송이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작고 여린 꽃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조금 불고 옆에 있던 작은 가지가 스쳐도 꽃은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바르르 꽃잎을 떨 뿐이었다.


 그는 더 지켜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꽃은 아마 오늘 밤엔 지지 않을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이부자리에 바로 눕지 않았다. 방금 본 꽃 한 송이가 내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매화나무는 그의 기억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전에도, 분명히 그런 적이 있었다.




*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 잠에서 깨어나고도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시중을 드는 노인에게 아침부터 차를 내오라고 하니 노인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어린 잎 향기가 나는 녹차가 그의 앞에 내어졌다. 먹기 좋게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랄지,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그는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밖으로 나서니 아침부터 햇볕이 쨍했다. 땅이 벌써 미지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며칠 전부터 봉오리를 하나씩 피워낸 벚나무와 매화나무들이 활기를 띠고 완전히 피어나고 있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색으로 덮인 풍경이 조금은 생소하다 느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매년 보는 꽃이 유난히 생경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떠올릴 때면 매번 가슴 한 구석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침식사를 조금 남기고, 평소보다 일찍 저택을 나섰다. 그는 더이상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휴일이라 업무도 보지 않고 해야할 일도 없어 전에 없이 한적한 하루가 될텐데, 오늘은 딱 하나 특별한 일이 남아 있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마음을 가라앉혀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었으면 하는데."

 "무슨 일이시오."
 "호정대의 일이네."




 정령정 밖으로 나가는 일에는 본래 절차가 있었지만, 그가 조금만 완고하게 행동해도 문지기들은 순순히 그를 내보내주었다. 그가 자신의 지위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일은 잘 없었다. 어찌 보면 그렇기에 더욱 이런 식의 행동이 별다른 의문 없이 문지기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유유히 목적지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가 최근 루콘가로 자주 드나들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가장 처음은 업무의 일환이었지만, 머지 않아서 업무는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히 루콘가로 향했다. 훈련 목적으로도 한 번 간 적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그가 사는 곳에 비해서 너무나도 척박한 이 풍경에 적응되어 있었다.

 사실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동안은 루콘가가 어떻든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되기도 했다. 가문과 자신의 명예로부터 오는 고고함을 항상 지키고 살던 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팍팍한 삶에 시들어버린 루콘가의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힘든 삶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따뜻함을 지키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살기 위해 자신의 동생을 버렸노라고 고백했을 적에도 그는 그녀를 질책하거나 하지 않고 이해해주었다. 이런 곳에서는 그보다도 더한 일이 많을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듯 이야기한 꽃구경을 가고 싶다는 말이 신경쓰여서, 그는 그녀가 사는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꽃무리가 있는 곳을 찾아 놓았다. 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구경할 틈이 없었다는 그녀의 말이 안쓰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힘들게 찾아 보아야 하는 그녀의 사정이 언제나 애처롭고 딱했던 차였다.

 하지만 그 단순히 애처롭고 딱하던 마음이 언젠가부터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머리 한 켠을 꽉 차지하고 놓아 주질 않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그에게는 생소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오셨어요."



 이제는 그녀도 그를 맞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어깨가 여전히 말라 있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곳에 매화가 많은 곳이 있는데, 가지 않겠소?"

 "매화요?"



 그가 갑작스레 묻자 그녀가 놀란 듯 반문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우물쭈물 좋다는 답을 내놓았다. 꽃을 보러 나간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다는 말이 따랐다.

 


 "그래도, 좋아요."



 그녀와 걸음을 맞추어 가려니 도착하기까지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기대감에 찬듯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해주는 그녀의 모습이 딱 봐도 들떠 있었다. 그도 차분하게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좁은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가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긴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좋았다. 맨발이 안쓰러워 그가 구해준 신을 신고 조심조심 걷는 것는 모양새가 어린 아이 같았다. 그가 점찍어둔 곳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더욱 높게 떠 있었다.



 "와아……!"



 눈앞에 펼쳐진 꽃무리에 그녀의 눈빛이 밝아졌다. 유연한 바람이 부는 사이에 매화향이 함께 실려왔다. 그녀는 꽃을 처음 보는 어린 아이마냥 얼굴에 빛을 가득 띄우고 웃었다. 그는 연분홍빛 꽃들보다도 그보다 환하게 피어난 얼굴에 더 눈길이 갔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꽃을 바라만 보더니, 나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장 낮은 나뭇가지에 핀 꽃에 손을 뻗어 한 송이 꺾어내고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예뻐요."



 길지 않은 말인데도 그 안에 가득 담긴 설렘이 파도처럼 차오른 것이 느껴져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할 때마다 정원으로만 나가도 하릴없이 구경할 수 있는 꽃인데, 그녀에게는 전혀 다른 듯했다. 아름답게 수놓아진 비단옷도, 보석이 박힌 장신구도 한아름 가득히 펼쳐진 꽃보다 그녀에게 잘 어울릴 순 없었다. 좀처럼 들뜨는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니 그녀는 혼자서 햇빛을 받고 있는 꽃봉오리처럼 밝았다.



 "이곳이 마음에 드오."

 "네, 무척, 무척 마음에 들어요."



 이것 좀 보세요…… 그녀가 방금 꺾은 매화 한 송이를 내밀었다. 흔하게 보던 꽃이었지만 유달리 다르게 보였다. 그는 조심스레 꽃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올려진 꽃송이는 이내 바람에 흩날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쉽지 않은 듯 다시 나무 위 꽃들로 눈을 돌렸다. 한 장 두 장 떨어지는 꽃잎이 분홍빛을 띤 눈송이처럼 보였다.



 "이렇게…… 많이 피어 있는 건 처음 보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옆모습이 왠지 안쓰러워서, 그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항상 조금 차갑게 식어있던 몸이 열기로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볕이 더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마른 어깨가 조금 떨려왔다. 그리고 어쩐지 그의 속도 조금,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역시도 더워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찬찬히 입을 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그는 모든 것이 다 평온해지는 듯 했다.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감싼 자신의 손과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어떻게 전하면 좋을 지 몰라 밤을 다 지새게 만들었던 말을 꺼내려고 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문득 그녀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손을 뻗어 꽃가지 하나를 꺾어내었다. 꽃잎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향기를 퍼뜨렸다. 그는 그녀의 손에 꽃가지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꽃을 쥐지 않은 손을 잡았다.



 "……매년, 내가 사는 저택에는 마당에 이 매화가 피오."

 "……네."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그가 이런 말을 하니 그녀는 사뭇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도 똑같이 이렇게 피어있소. 여기 있는 나무의 수보다는 적지만."

 "네, 틀림없이 예쁘겠네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는…… 당신과 그곳의 꽃을 매해 함께 보고싶소."

 "……네?"



 여태까지의 말은 잘 이어왔지만, 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 그는 조금 숨을 골라야 했다.



 "히사나, 나랑 결혼해주겠소?"


 

 그녀는 잠시 숨이 멎은 듯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커진 눈동자와 그의 손 안에서 깜짝 굳어버린 손가락 끝이 그녀가 얼마나 놀라 있는지 말해 주었다. 조그맣고 마른 손을 그가 힘주어 쥐었다. 그 힘에 다시 놀란 듯 그녀가 살짝 몸서리쳤다. 진정하려는 듯 천천히 숨을 내쉬고 맑은 눈동자를 당황한 듯 도르륵 굴리고 왠지 모르게 발가락이 조금은 오므라드는 그 일련의 과정을 그는 그저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얗고 핏줄까지 보일 듯 투명한 그녀의 뺨에 꽃잎같은 혈색이 불그스름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꽃보다도 조용하고, 환하게 피어나는 듯했다.



 "……뱌쿠야 님, 좋아요."



 그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뺨에도 꽃이 조용히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




 눈을 떴을 때, 그는 꿈을 꾼 것인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이마를 짚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는 무거운 기운을 떨쳐버리려 일어나 나섰다. 잠시 천천히 걷다가, 불현듯 기억이 떠올라 어젯밤에 보았던 매화나무로 향했다. 아침에 시중인들이 정원을 정리했는지 떨어져 있던 꽃잎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아직 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매화 한 송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붉은 빛이 아침 햇볕과 만나 더욱 선명했다. 그 색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는 어제처럼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꽃이 언제 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직접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날이 더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계절이 확실치 않더니, 정말로 오늘이 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하루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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