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누이는 물색 프리지아와 연분홍색 장미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무난하게 장미가 좋으려나. 그런데 프리지아 색이 너무 마음에 들어…… 옆에 직원이 미소지은 채로 서서 기다려주는데 그게 신경쓰여서 오히려 결정하기 더 어려웠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고민하자니 다리도 저렸다. 아예 다른 선택지로 갈까. 좀처럼 답이 안 나와 괜히 뒤돌아 꽃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타이밍 좋게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어, 고미노모토."
"아, 누이 양."
누이는 손을 슬슬 흔들며 방금 들어온 고미노모토에게 다가갔다. 예의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미노모토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얀 블라우스에 짙은 남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모습에서 나이답지 않은 우아한 분위기가 났다.
"좋은 오후에요."
"응. 꽃 사러 왔어?"
"네. 오늘 아즈사 군이 연주회가 있어서. 보러 가려고요."
타카하타의 이름을 말하는 고미노모토의 얼굴이 꽃봉오리 같았다.
"나돈데. 타카하타가 아니라 쥰 보러 가는 거지만."
타카하타도 나온다고 했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오늘 동네에서 있는 연주회라곤 딱 하나밖에 없었다. 꽃, 고르셨어요? 고미노모토가 누이 뒤의 진열장을 힐끗 넘겨다보며 물었다. 안그래도 한참 못 고르고 있는 참이었는데 잘 됐다. 누이는 고미노모토의 손을 이끌고 다시 진열장 앞에 섰다. 흰 조명에 방금 뿌린 물기를 머금은 꽃들이 싱싱하게 빛났다.
"고민 중이었어. 프리지아랑, 장미랑..."
심각한 표정으로 두 종류의 꽃을 가리키니 고미노모토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꽃말이라든가, 그런 걸 알면 고르기 쉬울 줄 알았더니 고미노모토가 말해준 꽃말은 둘 다 딱히 연주회나 축하의 뜻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다시 고민에 빠진 누이에게 문득 고미노모토가 말을 건넸다.
"그렇게 못 고르겠으면, 그냥 둘을 섞어서 꽃다발을 만드는 게…?"
어라.
"…맞아. 그러면 되는 거네."
누이는 10분 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자신이 왠지 바보처럼 느껴졌다. 둘이 색도 잘 어울릴 것 같고요. 고미노모토가 덧붙였다. 그것도 그렇네.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누이가 동의했다. 옆에서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직원이 냉큼 장미와 프리지아를 반 다발씩 꺼내 카운터로 가져갔다. 시원한 기운이 꽃과 함께 스쳐지났다. 고미노모토는 누이와 달리 금방 꽃을 골랐다. 수선화와 백합. 희고 맑은 꽃잎들이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예쁘다."
먼저 완성된 꽃다발을 받아드니 기분이 좋아진 누이가 웃었다. 물빛의 프리지아가 큼직큼직한 연분홍색의 덜 핀 장미 사이로 드문드문 풍성함을 더하고 있었다. 섞이니까 색이 더 예쁘네. 보드랍고 촉촉한 꽃잎 사이에서 향기가 배어나왔다. 누이는 잠시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여러 종류의 꽃들이 합쳐지면 더 예쁜 것 같아요."
색감이 화려한 누이의 꽃다발과는 다르게 정갈하고 우아한 꽃다발을 든 고미노모토가 환히 웃었다. 꽃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네. 누이는 문득 진심이 담긴 말을 던졌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고미노모토의 얼굴에 부끄러운 표정이 스쳤다.
"진짠데. 칭찬이야."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누이는 난처한 듯 웃는 고미노모토를 누그러뜨리려고 반쯤은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계산한 후 꽃집을 나서니 하늘과 프리지아의 색이 같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시내가 소란스럽게 붐볐다. 그 사이에서 꽃다발을 끌어안고 걸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품 안에서 계속 팔랑거리는 향기가 느껴졌다. 고미노모토와 소소하게 이야기하며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꽃, 좋아하려나.
*
연주회가 열리는 지역 학생회관 로비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규모가 생각보다 커 보였다. 피아노 치니까 보러 오라고만 했지 이렇게 큰 행사라고는 얘기 안 했는데. 단체로 온 듯한 교복 입은 중학생들부터 근처 학교들의 음악 담당 선생들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누이와 고미노모토를 포함해 여럿이었다. 둘은 출연자 대기실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로비 한복판을 마냥 돌아다녔다.
"어, 유라라."
"아즈사 군!"
그때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저편에서 타카하타가 걸어왔다. 고미노모토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누이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치하라도 왔네. 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둘 사이에서 약간 떨어져주었다. 둘은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곤 잠시 대화했다.
"그런데 곧 있으면 시작이라 가봐야 할 것..."
"아즈사, 여기 있었어?"
로비 중앙 기둥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하는 타카하타 뒤에서 갑자기 여자 한 명이 튀어나왔다.
"좀 있으면 시작이야. …그런데 이 아가씨는?"
"아, 누나. 이쪽은……"
"네가 유라라니?!"
"어, 정말?"
"진짜?!"
타카하타의 누나로 보이는 여자가 세 명이나 나타났다. 남동생과 닮은 누나들은 타카하타를 밀치고 나서더니 밝게 재잘거리며 고미노모토에게 다가섰다. 누이는 약간 더 물러서 주었다.
"진짜 예쁘다!"
"피부관리는 어떻게 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거는 대화라곤 믿기 힘들 만큼 친화력 있는 말이었다. 갑자기 타카하타의 누나들에게 둘러싸인 고미노모토는 잠시 당황한 듯 싶더니 이윽고 수줍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으음, 난 이쯤에서 빠져주는 게 좋겠는걸. 누이는 정신없어 보이는 고미노모토 대신 타카하타에게만 다시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대기실을 찾아 나섰다.
"차라리 전화를 할까."
이제 시작까지는 20분 남짓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슬슬 입장을 시작했는지 로비가 느리게 비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쥰은 대기실에서 나와 돌아다닐 성격도 아니니 전화하는 게 낫겠다 싶어 누이는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신호는 꽤 오래 갔다.
-어.
"나 왔는데. 대기실에 있어요?"
-어.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보러 가요?"
-어.
어 말고 다른 대답은 없냐고 톡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대기실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는데. 아까 타카하타한테 물어볼걸."
-만났어?
"응. 근데 고미노모토랑 같이 있으라고 두고 왔어요. 대기실 어딘데요?"
-맨 끝에.
느릿느릿 대답하는 건 전화 상이나 얼굴 보고 하는 대화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알려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볼멘소리를 하니 한 마디 더 해 준다.
-왼쪽.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잠깐 나와 있어요."
-어.
"어 말고."
-……응.
"한 글자 말고."
-얼른 와.
수화기 너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전화를 끊고 누이는 서둘러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회관 왼쪽에 있던 터라 금방 끝쪽에 다다랐다. 코너를 도니 아까 봤던 타카하타처럼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선 쥰이 보였다. 따지고 보면 교복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느낌인데 왠지 달리 보였다. 누이는 괜히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좀 있으면 시작이네. 점심은 먹었어요?"
"아니."
"왜 안 먹었어. 배 안 고파요?"
"별로. …그건 뭐야?"
쥰이 품 안의 꽃다발에 눈짓하며 물었다. 누이는 웃으며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선물. 지금 말고 이따 끝나면 줄게요."
"아니, 뭐."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떼다가 만 쥰의 뒤로 스태프처럼 보이는 사람이 출연자들을 불렀다. 머리 위로 관객에게 입장하라는 안내 방송도 들렸다.
"진짜 시작하려나 보네. 잘 해요."
"어. 너도 입장해."
"응. 이따가 봐요. 기대할게."
몇 마디 하지도 못했는데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워 누이는 돌아서는 쥰에게 할까 말까 고민하던 말을 건넸다.
"정장 잘 어울려. 멋있어요."
와, 이거 되게…… 입으로 뱉으려니 생각보다 부끄럽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쥰은 고개를 돌리더니 씩 웃었다.
"말은 네가 해놓고 왜 네가 빨개져."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 고맙다."
말을 우물거리는 누이 머리 위에 쥰이 손을 얹었다. 쓰다듬는 건지 헝클어뜨리는 건지 애매한 손길을 끝으로 그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괜히 말했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선 누이는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
중간 정도 되는 줄에 앉은 누이는 생각보다 무대가 멀리 보여 더 앞자리로 갈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입장할 때 받은 팜플렛을 펼쳐보았다. 순서가 제법 많았다. 1부와 2부로 나눠진 데다가 쥰은 2부 중간 순서였다. 타카하타는 1부 마지막이었다. 찬찬히 공연 순서를 짚어내려가는데 눈에 띄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마지막 순서였다.
-Libertango, 피아노와 첼로 2중주.
피아노 : 마키하라 쥰 첼로 : 타카하타 아즈사
리베르탱고라면 누이가 한때 자주 들었던, 좋아하는 곡이었다. 어떤 느낌인지 상상해보려고 멜로디를 떠올려보는데 공연장 안의 불이 완전히 꺼지더니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음악 듣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가요에 국한된 이야기라, 이런 연주회에 관객으로 온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첫 번째 연주자가 올라오기 전, 조명 아래 덩그러니 놓인 깊게 빛나는 검은색 그랜드피아노는 누이에겐 생경했다. 그래도 쥰이 음악실에서 연주하는 걸 평소에 열심히 구경했는데 무대와 다수의 관객이 주는 느낌은 누이에게도 여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누이는 발목을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자신은 관객인데 왜 괜히 뻣뻣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곧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연주곡들은 아는 곡 반, 모르는 곡 반이었다. 서정적인 곡이 대부분이었는데 음향이 상당히 좋아 악기의 울림이 깊게 들렸다. 누이는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감상했다. 명확한 표현은 어려웠지만 연주자마다 다른 김이 서린 음색이 있었다. 생소한 감각이었다.
1부 끝물에는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들이 올라오느라 진행이 느려졌다. 그러다 중후한 몸체의 첼로가 올라오는 걸 보고 마지막 순서란 걸 알 수 있었다. 정장을 갖춰입은 타카하타가 무대에 올라왔다. 그러고보니 연주하는 걸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은데. 누이는 앞에 느꼈던 것의 몇 배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타카하타의 연주에선 묵직한 듯 부드러운 음색이 났다. 그러고보니 고미노모토도 이걸 보고 있겠네... 누이는 저도 모르게 자기 아래쪽 객석을 시선으로만 빙 둘러보았다. 고미노모토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 봤던 꽃봉오리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타카하타의 연주가 끝났을 때, 누이는 진심으로 박수쳐 주었다. 첼로 활을 내리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인터미션을 안내하는 방송과 함께 객석의 불이 다시 밝았다.
인터미션 사이에 화장실을 가려고 나와봤더니 줄이 꽤 길었다. 굳이 가고 싶었던 건 아니라서 가볍게 손만 씻고 일찌감치 다시 좌석에 앉는데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보고 있냐.]
느릿한 어조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당연하죠. 잘 보고 있는데.]
[그래?]
그러더니 다른 말이 없었다. 누이는 잠시 기다리다 먼저 몇 글자 보냈다.
[잘 해요. 나 보고 있으니까.]
[너야말로 잘 봐. 졸지 말고.]
안 졸아요. 답을 하려는데 인터미션이 끝나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누이는 얼른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2부는 1부에 비해 격정적인 곡들이 편성되어 있었다. 누이의 취향에는 이쪽이 좀 더 맞았다. 하지만 1부 때보다 편하고 꽤 흥미롭게 감상하다가도 쥰의 순서가 다가올수록 공연 시작할 때처럼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내가 긴장을 왜 하지. 쥰 직전의 연주에서는 곡에 제대로 집중이 안 될 정도였다. 누이는 괜시리 꽃다발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종국에는 멜로디를 알아듣지도 못했다. 사회자가 올라와 쥰의 이름을 불렀다. 남이 부르는 이름만 들어도 얼굴에 피가 몰릴 것 같았다. 쥰이 무대에 올라오기까지의 공백은 다른 때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느긋하게 무대에 올라오는 쥰을 핀 조명이 천천히 비춰 주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넥타이 없이 셔츠에 검은 정장 재킷만 입은 지극히 그다운 모습이었다. 누이는 다시 얼굴을 꾹꾹 손으로 눌러야 했다.
익숙한 듯 부드럽게 피아노 의자에 앉은 쥰은 가늠하듯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더니 금방 연주를 시작했다. 누이도 음악실에서 몇 번 들었던 곡이었다. 페달을 밟느라 조금 흔들리는 몸과 춤추듯 움직이는 손가락을 제외하면 쥰은 놀라울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음악실에서 연주할 때와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거리감 있는 좌석에서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쥰은 보고 있는 관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의연한 표정이었다. 곡은 점점 격정적으로 치달아 가는데도 연주하는 손은 담담했다. 그 불균형에 가까운 분위기는 여태 나왔던 다른 연주자들과 상극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누이는 눈도 잘 깜빡이지 않고 무대 위의 쥰에게 집중했다. 가까이 있을 땐 몰랐는데, 관객의 입장으로 보니 그는 유난히 눈에 띄는 연주자였다. 그의 손도 매일 잡는 손인데, 저렇게 조명 아래 건반 위에 있으니 달라 보였다. 온전히 피아노에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나보다 좋은 사람이 맞아.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 연인에게 곧 답례로 안겨줄 꽃다발의 향기가 박수 대신 퍼졌다.
*
2부의 후반부는 연주자들의 합동 공연 위주였다. 가요를 편곡한 메들리나 합창 등 가볍게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누이는 즐거워져서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다른 관객들도 이따금 가볍게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주는 등 전체적으로 경쾌했다.
그리고 쥰과 타카하타의 리베르탱고는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무대로 적격이었다.
둘은 함께 무대로 올라와 각자의 위치에 앉았다. 쥰은 앉자마자 재킷 단추를 풀고 건반을 손으로 가볍게 훑었다. 눈짓 따위의 간단한 사인도 없이 쥰이 먼저 연주를 시작했고, 타카하타도 여유로이 활을 들어 잠시 기다리다 이내 제 선율을 만들어냈다.
언제 같이 연습했지. 점심 시간에 어딜 그렇게 가나 했더니 이거 연습했구나…… 쥰이 독주를 하거나 합창부의 반주를 하는 건 봤어도 다른 악기와 합주를 하는 건 처음 봤다. 아까보다 훨씬 빠른 쥰의 손을 누이는 넋놓고 바라보았다. 익숙한 곡이 새롭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가뿐하게 연주하는 것처럼 보여도, 꽤 무게감있는 음색이었다. 속에서 감탄이 절로 터졌다. 연주가 끝나 박수를 칠 적엔, 누이는 두 사람의 연인이나 친구가 아닌 한 관객이 되어 있었다.
*
"수고했어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누이는 곧장 대기실로 갔다. 출연자들의 가족이나 지인들, 회장을 정리하는 스태프들로 대기실은 난장판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소란했다. 쥰은 냉큼 달려온 누이를 보곤 구석 의자에 대충 던져 놓았던 가방을 들고는 척척 걸어나왔다.
"일단 좀 나가고."
그리고는 냅다 누이 손을 잡고 대기실 밖으로 이끌었다. 로비 역시 퇴장하는 관객들로 바글거렸다. 쥰은 거침없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는 회관 밖으로 나섰다. 곧 해가 지려는 듯 프리지아 색 하늘에 노란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좀 덜해지자 쥰은 그제야 누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고미노모토랑 타카하타한테 인사 못 했는데."
"학교에서 해."
간단하고 명쾌한 대답. 쥰은 더운 듯 풀어헤쳤던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잘 봤어요. 진짜 멋있었어."
이번엔 얼굴 붉어지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매일 옆에서 봤잖아."
"그래서 똑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누이는 제 손목을 아직도 붙들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방금 전까지 그런 연주를 했구나.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쥰은 별다른 것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무대 위든 아래든 같은 사람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이는 그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걷다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공연 축하 선물. 이제 줄게요."
그러자 쥰이 시선을 돌리더니 누이의 얼굴과 꽃다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해, 안 받고. 내가 엄청 오래 고른 거예요."
"네가 들고 있어."
"어?"
예상 외의 반응에 당황한 누이가 걸음을 멈추자 쥰도 덩달아 멈췄다. 아직 싱싱하고 예쁜데. 괜히 향을 한 번 더 맡느라 꽃에 얼굴을 묻는데 왠지 꽃잎이 전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꽃 안 좋아해요? 프리지아 별로야?"
"아니, 예쁜데."
쥰은 누이가 당황하든 말든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와 반대로 누이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선물인데."
"그러니까 네가 들어."
다시 내밀어봤지만 쥰은 이번엔 아예 꽃다발을 든 손을 잡고 누이에게 도로 밀었다. 얄미울 정도로 흔들림없이 담담한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들고 가는 걸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저 재킷이랑 가방까지 들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려곤 해도 누이는 꽤 섭섭해졌다. 진짜 안 좋아할 줄이야. 입술이 저도 모르게 삐죽 튀어나왔다.
"알았어요. 내가 들게."
"응."
왠지 만족스럽게 들리는 어조였다. 누이가 더 삐죽거리기도 전에 쥰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손은 안 놓았다. 누이는 톡 쏘고 싶은 기분이 돼서는 자기보다 마디 하나 더 큰 손을 잠시 쏘아보다 말았다. 손이 무슨 잘못이야. 그냥 다음에는 끝나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짝 늦게 따라오는 누이를 쥰이 살짝 돌아보았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같은 사람 맞네."
"뭐."
"아니에요."
그냥, 내 연인이랑 같은 사람 맞다구요. 뒷말은 얼굴 빨개질까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