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민트, 이름 그대로 사과향이 나는 민트다. 보통의 민트보다 순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차로 많이 마시고, 요리에도 많이 사용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꽃도 핀다. 희고, 조그맣고, 종잇조각 찢어 구겨놓고 뭉쳐놓은 듯한 모양이다. (더 로맨틱하게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꽃말은 민트 공통의 꽃말인 '다시 한 번 사랑하고 싶습니다'와, 애플민트만의 꽃말인 미덕.


미덕.


아마 그 미덕에 애플민트 껌을 짝짝 씹는 일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의미 불명의 파티에 오는 일도, 그 파티의 가장 구석자리에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까부터 스테이지에서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샴페인인지 뭔지를 터뜨리더니 이젠 그걸 몸에 부어 가며 춤을 추고 있다. 그 여자애들의 행태를 관찰하듯 유심히 살피는 일도 미덕은 아닐 것 같다. 이곳에서 미덕을 실천하려면 당장 여길 빠져나가 112에 전화를 걸어 미성년자들이 술과 마약에 쩔어 있다고 신고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냥 집 가서 엄마한테 시험 망했다고 자백하든지. (내 성적도 미덕에 미포함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플민트 껌을 씹고 있다고 해서 굳이 그 꽃말을 실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쪽이 더 정신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이 파티가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정신이 나가다 못해 있던 정신도 소멸할 수준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후 4시부터 판 깔고 시작했다던 파티는 이미 내가 도착한 저녁 즈음엔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따가운 조명 아래에 이미 한 무더기의 미성년자들이 약에 쩔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이 파티를 아주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일탈과 청춘이라는 시시하고 지루한 명제 아래에 자신의 젊은 육체를 아낌없이 내다버리는 것이다. 아주 멍청하고 도발적인 짓이다. (그 도발적이란 단어조차 식상해진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내가 이 하등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에서 구석에 콕 처박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여길 비웃는 일은 꿈꾸다가도 할 수 있다. 방금 춤추던 여자애들이 테이블에서 비싸 보이는 양주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고 나서 다들 진득하게 킬킬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것도 약을 탄 게 틀림 없다. 8명의 손을 탄 술병이 마지막 손으로 옮겨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양주는 그대로 곱게 원래 자리에 다시 놓아졌다.


아무도 마지막 타자가 그 술을 마시지 않은 걸 신경쓰지 않는다. 혹은 모르거나. 어차피 머리 바로 위에 달린 저 기괴한 조명 때문에 서로 얼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혼자만 쏙 빠진 마지막 타자는 스테이지로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내리더니 아까의 정신 나간 얼굴은 어디 가고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이질적이라고 표현한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차분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내가 앉은 곳은 이 클럽의 구조 탓에 조명이 벽에 막혀 눈에 잘 띄지 않는 말 그대로 구석이었다. 일종의 관객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이지와 이 소파 사이에는 각종 테이블과 술병과 사람이 엉켜 있다. 그 사이를 뚫고 눈이 마주쳤다고 하면... 답이 없다. 그 많은 장애물을 아주 유연하게 비켜가면서 이쪽으로 척척 걸어오는 걸음이 또박또박하기도 하다. 나는 버리기 귀찮아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껌종이를 꺼내 단물 다 빠진 껌을 뱉곤 아무 데나 집어던졌다. 은색 껌종이도 사뿐히 피하는 걸음.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 온다.



"재밌어요?"
"...아니."



이치하라 누이가 피식 웃었다.



"거기 그러고 있을거면 여기 왜 왔어요?"
"초대받아서."
"초대? 누구한테?"
"우리 반 반장. 타케야마."
"아, 그 등신."
"그래도 선배님인데 그렇게 막 불러도 되냐."



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일단 그 새끼는 등신이 맞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익숙한 얼굴을 꽤 많이 봐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치하라는 대번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등신."



내가 반응을 안 해주니 또 혼자 피식 웃는다.



"재미없네요."
"누가."
"선배님이요."



넌 꽤 재미있는데,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여기 물 없어요? 이치하라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어디선가 음료수 병을 찾아왔다. 레몬 탄산수. 뚜껑을 열고 서슴치 않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아까랑은 영 달랐다.



"뭔 줄 알고 마셔."
"탄산수요. 마실래요?"
"아니."
"약 안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
"비밀."



다 마신 병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그 위에서 또 뭘 찾는다. 안에 투명한 액체가 반쯤 남은 주사기를 집어들더니, 그대로 플라스틱 뚜껑 위에 박아넣는다. 피스톨이 끝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주사기를 바닥 어딘가로 집어던졌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보여서 조금 감탄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하는 건데?"
"재밌으라고요. 선배님 마실래요?"
"안 마셔."
"그러니까 재미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너도 별반 다를 거 없지 않냐."



새초롬하고 맑은 얼굴빛, 여기선 찾아볼 수 없는 안색이다. 이치하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는 여태껏 지켜보고 있었던 스테이지 위의 여자애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정신 나갔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약에 술에 취해 있던 애들. 단 한 명 빼고.
샴페인을 먼저 딴 건 이치하라였다. 이윽고 다들 그걸 머리 위에 붓고 난리를 치느라 흠뻑 젖은 꼴이 됐는데 이치하라의 옷은 새하얀데도 젖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자기가 무슨 꼴인지도 모르고 춤을 추는 와중에도 이치하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손으로 빗어내렸고, 때로 속내가 훤히 보이는 남자들이 올라올 때마다 웃으며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향했다. 조명이 너무 밝고 눈에 띄어서, 사진에 찍힐까봐 다들 슬금슬금 피하는 곳. 하지만 저기서 사진을 찍히면 오히려 얼굴이 조명 때문에 하얗게 날아갈 거란 생각까지 할 정신머리가 있는 인간은 여기에 몇 없다.




"그래서, 시험 끝날 때마다 이렇게 개차반처럼 노는 거야?"
"아니요?"
"처음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시험이랑 상관 없이 2주에 한 번씩."
"약 해?"
"안 해요. 내가 미쳤다고?"



등신, 이라고 말하던 눈빛으로 다시 날 본다.



"그럴거면 굳이 여기서 안 놀아도 되지 않냐?"
"나 훈계하려고 온 거 아니죠?"
"그냥 궁금해서."
"이유 그런 거 없어요. 여기가 제일 재밌거든요."



그러더니 내 눈앞에 오른손을 들어보인다.



"첫째, 취하지 말 것."
"뭐하냐."
"둘째,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
"..."
"셋째. 마음껏 즐길 것."



세 손가락이 접힌 손을 만족스러운 듯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득 다시 껌이 당겼고,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껌 씹을래?"
"응."



그리곤 내가 내밀기도 전에 손에서 쏙 빼가 입에 넣는다. 애플민트 향이 약하게 감돈다.



"그럼 난 다시 갈래요."
"어딜."
"스테이지."



점점 말이 짧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껌을 씹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이치하라는 인사도 없이 바로 스테이지를 향해 돌아섰다. 흰색 프릴이 달린, 보통 여자애들은 데이트 할 때나 입을 법한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린다. 나는 껌을 입에 넣었다. 달고 화한 애플민트 향이 입안에 다시 가득 찬다. 미덕, 그 꽃말을 다시 떠올린다. 미덕, 이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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