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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한 볕이 누이의 속눈썹 사이를 파고들었다. 누이는 꿈결로부터 눈을 떴다.
뻑뻑하고 따가운 시야 사이에 가장 먼저 든 것은 훤히 방 안을 채운 물결 같은 볕이었다. 출렁거리는 빛의 잔영을 찬찬히 훑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가, 금세 손을 내리곤 다시 부스스 번지는 망울로 눈동자를 옮겼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빛이었다. 다만 조금 안락한 색깔을 띠었다. 잠기운이 한 김 가실 때까지 그렇게 하얀 벽을 반으로 가른 경계선만 쫓으며 누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수면 위로 기포가 떠오르듯 가만 터지는 조그마한 떠오름이 있었다. 별 건 아니었고 이제서야 봄이라는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옷의 두께가 얇아진지는 몇 주나 되었는데 기온과 체온의 간극이 너무 길어 스스로가 둔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부정할 수 없이 봄이었다. 벚꽃은 한참 전에 떨어졌고 벚꽃 그 다음의 꽃들이 핀다. 무슨 꽃들인지 대부분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그 꽃들이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꽃은 활짝도 핀다. 아마 문 열고 내려가면 새삼스럽게 눈이 아파올 정도의 꽃들이 피어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심히 지나쳤던 한 철의 것들. 꿈 같은 색들.
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요즘 꿈결에서 헤어나는 일이 이상하게도 어려웠다. 잠이 모자란 것 같았다.
빛을 가로지른 한 가운데 서서 균형을 잡고 느리게 욕실로 걸었다. 미지근한 물을 얼굴에 끼얹어 세수를 하고 물이 튀어 젖은 머리카락을 젖은 손으로 대충 그러모아 묶었다. 그제서야 눈꺼풀이 한층 가벼워져 깜빡이는 감각이 옅어졌다. 오늘은 딱히 정해진 할 일이 없었다. 요즘 대부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한순간 늦잠이나 더 잘 걸, 부질 없는 후회가 바람처럼 스쳤다. 그렇지만 이미 방 밖으로 달아난 잠이 되돌아올 리 없다. 누이는 어질러진 침대 한가운데에 걸터 앉아 막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이 벽에 그려진 빛의 수평선이나 보고 있었다. 조금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아, 그 꽃들, 지기 전에 보러 가야 하는 걸까.
꿈결에서 다 헤어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달아난 줄 알았던 잠이 슬금슬금 볕을 타고 다시 기어들어왔거나. 어딘가 묘하게 색조가 맞지 않는 스펙트럼을 떠올리곤 그 위에 꽃잎 모양을 대강 덧씌워 보았다. 밖으로 나가서 구경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예쁜가, 아닌가. 잘 모르겠다. 꽃의 예쁨을 좋아하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알 수 없었다. 다시 나가서 그 보드라운 것들을 눈앞에 대고 들여다보면 기억이 날까? 이것도, 잘 모르겠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한다고 해도 무어라 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아무도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꿈결에 조금 더 푹 잠겨 있기로 했다. 이제까지 빛 속에서 푹 젖어 있던 것처럼.
언젠가는 여름 볕에 말릴 날이 오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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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cked Act
First Think
참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탄야 랜킨은 생각했다.
그는 실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빛이었고, 백색 그 자체였으며, 동시에 초록빛 불을 뿜는 생명이기도 했다. 검은색 렌즈에 가려진 눈동자를 반딧불이 비추어내면, 밤의 장막을 걷는 에오스 같은 우아한 갈색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다 이내 다시 가리워졌다. 그는 그리도 아름다웠다. 온 빛이 그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저기 저 아름다운 청년을 보라며.
그러니 그가 당연히, 마음에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탄야 랜킨은 소리 없이 웃었다.
First Act
데샹이 직접 전갈을 보내는 일은 드물기도 했지만,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미쉘 모나헌은 불안함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예의범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노크부터가 그랬다. 닥터가 만나자고 했어. 자택에서. 이따 저녁에. 급히 내뱉느라 제대로 문장조차 되지 못한 단어들이 툭 발치에 떨어졌다. 하얗게 탄 눈동자가 그 문장들을 좇아 굴러간다. 다음부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하렴, 그렇지 않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쉘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이 내 눈밖에 볼 수 없도록 만들어주마."
천천히 말을 마치자 미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리도 유약한 기적이라니. 랜킨은 무심하게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불규칙한 발걸음이 덫으로부터 도망치듯 빠르게 빠져나갔다.
해가 질 무렵, 랜킨은 전갈이 까드득거리며 꼬리를 치켜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유해주는 벌레 떼가 있단다. 아무리 속살거려도 전갈은 들을 수 없을 터였다. 랜킨은 꼿꼿이 선 전갈을 꼬리부터 쥐어 천천히 바스라뜨렸다. 진득한 독이 창백한 손을 씻어내듯 흘러내리다 이내 휘발되어 사라졌다. 데샹 앞에서는 전갈을 풀어 놓을 마음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굳이 녹여버릴 필요까진 없으니까. 그렇지만 가만히 두어서도 안 된다.
마음에 든 것은 반드시 사로잡아야 해, 손아귀에 넣고 술잔을 기울이듯 천천히 내 속으로 흘려버려야지. 아무도 같은 술을 다신 맛볼 수 없도록.
/
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벌레가 나돌아다니기 좋은 밤이로구나.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서 녹아내렸다.
데샹은 자택 문을 거의 잠가두지 않았다. 초대한 사람이 있어서인지, 본래부터 신경쓰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조차도 없었고. 랜킨은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현관의 불은 언제나 꺼져 있었다. 오직 데샹 자신이 있는 방만 밝혀 놓으니까. 달빛조차 들지 않아 밤의 거리보다도 더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걸었다. 하이힐이 벽에 부딪쳐 초인종 대신이라도 되듯 울렸다. 랜킨은 가장 안쪽 방의 문을 열어제꼈다. 눈이 부시다고 느낄 정도의 밝은 조명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데샹은 여지 없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이쯤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혹은 오히려 언제 들이닥칠지 굳이 예상하지 않았거나. 테이블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그를 지나쳐 등받이가 없는 벨벳 의자에 앉았다. 제법 수수한 척 하는, 그러나 상당한 기술과 재력이 사용된 이 방에서 유일하게 검은색을 가진 것이었다. 데샹이 놓은 가구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조금 기다리겠어?"
"그렇게 하지."
랜킨이 생각하건대 이 방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나 데샹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행동에서도, 그의 행보에서도 또한 그랬다.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 뻔한 습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약점을 찔린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뒷모습이나 그림자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랜킨은 그 등을 바라보았다. 바깥 일을 끝내고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도 하얀 가운을 차려 입은 새하얀 등.
방 안에서 미약하게 울리는 초침 소리가 서른 번을 넘어갈 즈음 랜킨은 일어섰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을 간결하게 정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이힐 소리가 다시금 울리자 데샹은 그제서야 돌아보았다. 자신의 제안에 가까운 부탁을 어긴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겠지. 세 발자국, 랜킨은 덥석 그의 입술을 물었다. 전갈이 꼬리로 적을 쏘는 것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사냥감이 독에 잠겨 잠잠해질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사냥감이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지극히 본능적인 손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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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민트, 이름 그대로 사과향이 나는 민트다. 보통의 민트보다 순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차로 많이 마시고, 요리에도 많이 사용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꽃도 핀다. 희고, 조그맣고, 종잇조각 찢어 구겨놓고 뭉쳐놓은 듯한 모양이다. (더 로맨틱하게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꽃말은 민트 공통의 꽃말인 '다시 한 번 사랑하고 싶습니다'와, 애플민트만의 꽃말인 미덕.
미덕.
아마 그 미덕에 애플민트 껌을 짝짝 씹는 일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의미 불명의 파티에 오는 일도, 그 파티의 가장 구석자리에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까부터 스테이지에서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샴페인인지 뭔지를 터뜨리더니 이젠 그걸 몸에 부어 가며 춤을 추고 있다. 그 여자애들의 행태를 관찰하듯 유심히 살피는 일도 미덕은 아닐 것 같다. 이곳에서 미덕을 실천하려면 당장 여길 빠져나가 112에 전화를 걸어 미성년자들이 술과 마약에 쩔어 있다고 신고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냥 집 가서 엄마한테 시험 망했다고 자백하든지. (내 성적도 미덕에 미포함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플민트 껌을 씹고 있다고 해서 굳이 그 꽃말을 실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쪽이 더 정신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이 파티가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정신이 나가다 못해 있던 정신도 소멸할 수준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후 4시부터 판 깔고 시작했다던 파티는 이미 내가 도착한 저녁 즈음엔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따가운 조명 아래에 이미 한 무더기의 미성년자들이 약에 쩔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이 파티를 아주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일탈과 청춘이라는 시시하고 지루한 명제 아래에 자신의 젊은 육체를 아낌없이 내다버리는 것이다. 아주 멍청하고 도발적인 짓이다. (그 도발적이란 단어조차 식상해진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내가 이 하등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에서 구석에 콕 처박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여길 비웃는 일은 꿈꾸다가도 할 수 있다. 방금 춤추던 여자애들이 테이블에서 비싸 보이는 양주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고 나서 다들 진득하게 킬킬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것도 약을 탄 게 틀림 없다. 8명의 손을 탄 술병이 마지막 손으로 옮겨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양주는 그대로 곱게 원래 자리에 다시 놓아졌다.
아무도 마지막 타자가 그 술을 마시지 않은 걸 신경쓰지 않는다. 혹은 모르거나. 어차피 머리 바로 위에 달린 저 기괴한 조명 때문에 서로 얼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혼자만 쏙 빠진 마지막 타자는 스테이지로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내리더니 아까의 정신 나간 얼굴은 어디 가고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이질적이라고 표현한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차분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내가 앉은 곳은 이 클럽의 구조 탓에 조명이 벽에 막혀 눈에 잘 띄지 않는 말 그대로 구석이었다. 일종의 관객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이지와 이 소파 사이에는 각종 테이블과 술병과 사람이 엉켜 있다. 그 사이를 뚫고 눈이 마주쳤다고 하면... 답이 없다. 그 많은 장애물을 아주 유연하게 비켜가면서 이쪽으로 척척 걸어오는 걸음이 또박또박하기도 하다. 나는 버리기 귀찮아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껌종이를 꺼내 단물 다 빠진 껌을 뱉곤 아무 데나 집어던졌다. 은색 껌종이도 사뿐히 피하는 걸음.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 온다.
"재밌어요?"
"...아니."
이치하라 누이가 피식 웃었다.
"거기 그러고 있을거면 여기 왜 왔어요?"
"초대받아서."
"초대? 누구한테?"
"우리 반 반장. 타케야마."
"아, 그 등신."
"그래도 선배님인데 그렇게 막 불러도 되냐."
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일단 그 새끼는 등신이 맞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익숙한 얼굴을 꽤 많이 봐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치하라는 대번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등신."
내가 반응을 안 해주니 또 혼자 피식 웃는다.
"재미없네요."
"누가."
"선배님이요."
넌 꽤 재미있는데,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여기 물 없어요? 이치하라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어디선가 음료수 병을 찾아왔다. 레몬 탄산수. 뚜껑을 열고 서슴치 않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아까랑은 영 달랐다.
"뭔 줄 알고 마셔."
"탄산수요. 마실래요?"
"아니."
"약 안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
"비밀."
다 마신 병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그 위에서 또 뭘 찾는다. 안에 투명한 액체가 반쯤 남은 주사기를 집어들더니, 그대로 플라스틱 뚜껑 위에 박아넣는다. 피스톨이 끝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주사기를 바닥 어딘가로 집어던졌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보여서 조금 감탄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하는 건데?"
"재밌으라고요. 선배님 마실래요?"
"안 마셔."
"그러니까 재미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너도 별반 다를 거 없지 않냐."
새초롬하고 맑은 얼굴빛, 여기선 찾아볼 수 없는 안색이다. 이치하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는 여태껏 지켜보고 있었던 스테이지 위의 여자애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정신 나갔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약에 술에 취해 있던 애들. 단 한 명 빼고.
샴페인을 먼저 딴 건 이치하라였다. 이윽고 다들 그걸 머리 위에 붓고 난리를 치느라 흠뻑 젖은 꼴이 됐는데 이치하라의 옷은 새하얀데도 젖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자기가 무슨 꼴인지도 모르고 춤을 추는 와중에도 이치하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손으로 빗어내렸고, 때로 속내가 훤히 보이는 남자들이 올라올 때마다 웃으며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향했다. 조명이 너무 밝고 눈에 띄어서, 사진에 찍힐까봐 다들 슬금슬금 피하는 곳. 하지만 저기서 사진을 찍히면 오히려 얼굴이 조명 때문에 하얗게 날아갈 거란 생각까지 할 정신머리가 있는 인간은 여기에 몇 없다.
"그래서, 시험 끝날 때마다 이렇게 개차반처럼 노는 거야?"
"아니요?"
"처음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시험이랑 상관 없이 2주에 한 번씩."
"약 해?"
"안 해요. 내가 미쳤다고?"
등신, 이라고 말하던 눈빛으로 다시 날 본다.
"그럴거면 굳이 여기서 안 놀아도 되지 않냐?"
"나 훈계하려고 온 거 아니죠?"
"그냥 궁금해서."
"이유 그런 거 없어요. 여기가 제일 재밌거든요."
그러더니 내 눈앞에 오른손을 들어보인다.
"첫째, 취하지 말 것."
"뭐하냐."
"둘째,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
"..."
"셋째. 마음껏 즐길 것."
세 손가락이 접힌 손을 만족스러운 듯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득 다시 껌이 당겼고,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껌 씹을래?"
"응."
그리곤 내가 내밀기도 전에 손에서 쏙 빼가 입에 넣는다. 애플민트 향이 약하게 감돈다.
"그럼 난 다시 갈래요."
"어딜."
"스테이지."
점점 말이 짧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껌을 씹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이치하라는 인사도 없이 바로 스테이지를 향해 돌아섰다. 흰색 프릴이 달린, 보통 여자애들은 데이트 할 때나 입을 법한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린다. 나는 껌을 입에 넣었다. 달고 화한 애플민트 향이 입안에 다시 가득 찬다. 미덕, 그 꽃말을 다시 떠올린다. 미덕, 이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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