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지금이 가장 중요해."


외관



 주홍빛 섞인 선명한 진저색 머리카락이 단연 두드러진다. 시원시원하고 결 좋은 곱슬머리가 보기 좋게 헝클어졌다. 크고 속눈썹이 짙은 눈매에 깊이 박힌 탁한 옥빛 눈동자가 대조적이다. 뺨이 쉽게 달아오르는 체질이고 도톰한 입술은 머리카락과 같은 빛깔이라 혈색이 화려하다. 웃는 표정과 무표정의 갭이 큰 편인데, 제 기분이 나쁠 때면 제법 오밀조밀하고 사랑스러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뿜기도 한다. 그러나 표정 자체가 다양하고 감정표현이 확실해 수시로 표정이 바뀌며, 웃는 모습은 발랄하다. 당당한 자세와 피하는 것 없이 항상 똑바로 마주하는 눈동자는 때로 거만하기까지 하다.

 적당히 마른 몸에 근육량은 많지 않아 체술에는 별다른 특기가 없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기백만은 절대 왜소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정도. 살결에 흔하디 흔한 흉터 하나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고생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귀는 뚫지 않았고 가끔 귀찌 형태의 귀걸이를 착용할 때가 있다. 러플 소재의 블라우스나 스커트, 색감이 화려한 코트 등 로맨틱한 디테일을 즐겨 입어 한눈에 보기에는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이 짙다. 구두굽은 높지 않고, 다소 장식적으로 느껴지는 레이스 소재의 장갑을 자주 착용한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지만 특별한 의도 없이 순전히 취향에만 따른 착장이다. 일을 하거나 이따금 눈에 띄어야 하지 않을 때만 검은색이나 짙은 색을 입는다.


이름
J. Augustus Halloway
제이 어거스터스 할러웨이

나이
23살

성별

키 / 몸무게
168cm/55kg

진영
아르미야[Armiya]

간부 신청 X


능력/ 등급

2등급 노이저

발산
The Diffusion

1. 감정 따위를 밖으로 드러내어 해소함. 또는 분위기 따위를 한껏 드러냄. 
2. 냄새, 빛, 열 따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감. 

 특정한 것의 온도를 주변에 있는 것들로 발산시킬 수 있다. 열기를 단숨에 발산시켜 급작스럽게 불씨를 폭발시키거나 반대로 냉기를 발산시켜 얼어붙게 한다. 이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직접적으로 불이 닿지 않아도 사람이 화상을 입고 죽게 할 수 있으며, 혹은 동사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은 이 발산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다면 적정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다만 발산 시 기체의 온도를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기체를 제외하고 반드시 대상까지 연결할 수 있는 물리적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또한 목표물을 정확히 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특정 온도가 범위 내로 퍼져나가게끔 하기 때문에 최종 발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거리에 따라 다르며 주변 환경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지점으로부터 멀리까지 발산시킬수록 정확한 온도를 전달할 수 없게 되며, 가장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범위는 10m 이내.

능력을 오래, 멀리 사용할수록 체온이 급격히 저하되어 저체온증에 이를 수 있다.


성격
 
[거침 없이 확고한]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둔] [두려움 없는 솔직함] [치밀하게 이기적인]

 고집이 세고 거침없으며 지독하게 확고한 탓에 쉽게 굽히지 않는다. 제 할말은 꼭 해야지만 성에 차고, 마음 먹은 바는 끝까지 해내고야 만다. 무엇보다 제멋대로이며 이기적이다. 완전한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정의와 도덕 같은 선한 가치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이득을 가장 우선시하며, 그 다음으로는 제 기분과 감정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만 보아서는 선과 악을 확실히 구분해낼 수 없다.

 기본적으로 계급이나 상하관계가 명확한 집단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 구속당하기도 싫어하며 타인의 충고나 참견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기를 싫어하는 만큼 타인의 영역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 역시 확실해 무엇이든 절대 빼앗기지 않고, 반대로 강제로 빼앗지도 않는다. 갖고 싶은 것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만, 주인이 확실하다면 크게 욕심내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가까이 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차가 크다. 자신이 마음을 열고 정을 준 사람에게는 발랄하고 사랑스럽게 돌변하기도 하지만, 적이라고 인지한 사람에게는 냉정하고 잔인하다.

 감정과 생각을 대체로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마치 자신의 능력처럼 그대로 '발산'시킨다. 표현이 확실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따금 무모할 정도로 두려움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는 말과 행동을 스스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움직이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느끼거나 자신에게 너무 벅차다고 느끼는 일이라면 미련 없이 포기한다.
 

기타

1. 인적사항

1996년 8월 24일생, 혈액형 RH+ AB형. 국적 영국.
J는 본명의 이니셜.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2. 가족/인간관계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영국인이지만 정확한 핏줄과 출신지는 미상이다. 현재는 런던 근교에서 홀로 살고 있다. 따로 사는 어머니가 있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어머니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편이고, 사이도 무척 좋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연락 중인지는 미지수다.
 가족 외의 인간관계도 그다지 넓지 않다. 잭 앰브로즈 이외의 특별한 친구도 없으며, 하다못해 흔한 소꿉친구나 아는 지인 따위도 없다. 아르미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평범한 일반인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토록 관계가 좁은 것이 의문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인간관계에 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르미야 내에서는 그럭저럭 원활하게 생활하고 있는 편이다. 유별나게 가깝다 싶은 사람은 없어도, 다가오는 사람을 밀쳐낼 정도까지도 아니라서 웬만하게 성격이 틀어져 싸우지 않은 이상은 조직원들과 친하게 지낸다.


3. 이능력 발현

 이능력이 처음 발현되었을 때 21세였다. 쓰레기 소각장 근처를 지나가던 중 불의 온도를 발산시킨 사건이 첫 번째. 조그맣게 타고 있던 불이 갑자기 크게 폭발하듯 커져 근처에 있던 학생 다섯 명이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목격자로서 조사받았으며,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사고로 종결되었다. 이후 한 달 동안 갑자기 사물이 발열하여 녹아내리거나 작은 불꽃이 폭발하는 등 이능력이 통제 없이 발현되었다. 이능력자들이 노이저로 명명된 이후에야 자신이 이능력자임을 자각했지만 정확한 능력을 깨닫고 통제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불씨 등을 크게 키워 화재를 내거나 아예 얼음으로 뒤덮는 수법으로 능력을 사용했지만, 능력을 자각하고 통제하게 되면서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은 직접적인 불이나 얼음보다는 오랫동안 켜져있던 전구나 형광등, 밤공기를 맞고 차가워진 외벽 등의 온도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불이나 큰 열기가 없었는데도 전신 화상으로 사망한 등의 사건은 대부분 제이의 작품이다.

 자신이 노이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그다지 오랜 시간과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던 케이스.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도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바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자각했으면서도 큰 경각심을 느끼지 않았다. 이능력의 이용이 수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몸을 사지로 내던지지는 않는다. 지금도 자신이 이능력자라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데, 이능력을 단지 자신의 일부 정도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이능력으로만 보여지고 평가당하기를 굉장히 싫어한다.


4. 행적

 자신이 이능력자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그래서 이능력자가 배척받던 시기에 거의 모든 인간 관계가 끊어졌다. 비능력자인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될 것을 우려해 정부의 격리 정책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정책이 무산된 이후에도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9년 1월 즈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잠적했다. 반년 가량이 지난 후인 2019년 7월 아르미야에 들어오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조직의 도움을 받아 다시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범죄자로서의 커리어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말단에 가깝지만 자유로운 조직 분위기에 힘입어 상하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행동한다. 경어를 쓰는 모습을 극히 보기 드물고 웬만한 고위 간부가 아닌 이상 존칭조차 잘 붙이지 않는다. 대신 누구에게나 편하게 대하고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여서 조직 내의 인간 관계는 나쁘지 않다. 할 말 다 하는 막내 정도의 포지션이지만 남을 선배 대접해주는 일은 거의 없다. 아르미야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서는 일부러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미야에서 제공받는 돈과 지원 등이 제법 필요하다는 뉘앙스는 자주 내비친다. 돈 계산에 있어서 무엇보다 확실하며, 조직 측에서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주지 못할 임무는 참여하기를 꺼린다.

 발산 능력을 이용해 직접 몸싸움에 참여하지 않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어 주로 암살에 가까운 청부 살인에 동원되며, 증거 인멸이나 현장 훼손이 필요한 경우에도 참여한다. 조직에 들어올 때에만 해도 이능력을 제외한 기타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체술을 익혔기 때문에 자기 한몸 정도 겨우 챙길 정도는 싸울 수 있다. 싸움보다는 특유의 성격 덕분에 심문과 협박 등에 소질이 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범죄에 연고라고는 없던 일반인이 들어온 것치고는 적응 속도도 무척 빨랐고 수법도 확실해 뒤탈이 없는 편에 속한다. 사람을 죽이고 협박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지만 아르미야의 일원으로서, 혹은 개인의 감정 때문에 행하는 모든 범죄와 비도덕적 행위에 어떤 가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


5. 기타

 -은색 지포라이터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흡연자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가지고 다니는 발산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완전히 비흡연자인 것은 아니고, 아르미야에 막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흡연자였지만 잭이 싫어해서 끊었다. 피우던 담배는 버지니아 슬림 레드. 호신용 나이프도 들고 다니기는 하지만 여태까지는 쓸 일이 많지 않았다.

 -단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시도때도 없이 사탕을 물고 다니며 심지어 일을 할 때에도 예외는 아니다. 사탕이 아니더라도 달콤하다면 뭐든지 좋아하며, 반대로 쓴 맛이 나면 거의 못 먹는 수준. 주머니에 항상 사탕을 몇 개씩 지니고 다닌다.

 -레이스 장갑을 자주 끼고 다니는데, 딱히 이능력 통제 같은 별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다. 그냥 장갑을 끼고 다니는 친구에게 맞춰 들인 습관이다.

 -아르미야에 들어오기 전에는 신문방송학과에 재학중인 대학생이었으나 잠적했던 시절에 이미 학교를 그만두었다.


선관

잭 P. 앰브로즈
고등학교 친구.

 정확한 나이는 다르지만 학년이 같았기 때문에 그냥 친구다. 매일 사소한 일로 싸우고, 도저히 맞는 취향이 하나도 없어 자주 으르렁거리지만 그래도 친구다. 비슷한 시기에 둘 다 이능력이 발현되었다. 잭의 주변인 중 그가 이능력자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제이는 가깝던 사람에게 자신이 이능력자임을 알렸고, 그 중 지금까지 가까운 사람은 잭 밖에 없다.

 잠적 시기에 잭에게도 연락하지 않았고, 아르미야에 들어가고 나서야 다시 연락했다. 그 사이 잭은 그리핀에 들어가 둘의 길이 완전히 반대로 갈렸다. 그러나 정작 잭은 제이가 잠적한 것이나 서로 아르미야와 그리핀으로 갈리게 된 것보다는 잠적한 사이 제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것에 더 화를 냈다. 잔소리 듣기 싫어서 담배는 끊었다.

 지금은 겉보기에는 전과 같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둘의 소속이 달라진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아르미야 내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절대 이야기하지 않으며, 잠적했던 시기와 이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선관 동시 합격 여부 O
O

선호플: 그런 거 모름 (성관계 비선호)
기피플: 역시 그런 거 모름... 노는게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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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임프Imp) 신청 여부 X


비밀설정

 출생지는 영국 빈민가. 5살 즈음 부모에게 버려졌다. 비슷하게 버림 받은 아이들을 모아 방치하듯 키우며 후원금을 챙기는 낙후된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도망쳤고, 기적적으로 보호자를 만나 자랐다. 그 보호자가 지금의 어머니이며 서류상으로는 2년 후에 입양되었다. 이때부터 다수의 사람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든 사람에게만 깊고 좁은 애착을 형성하는 성격이 생겼다. 입양 이후에는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고, 모녀 간 사이도 굉장히 좋았다. 

 능력이 각성하고 이능력의 원인이 특수인자로 밝혀지자마자 가장 먼저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것을 그들의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쭉 자신이 태어났던 곳을 찾아다녔고, 결국은 친부모가 사는 아파트까지 알아내 자신의 능력으로 불을 질렀다. 가연성 소재를 아파트 곳곳에 뿌리고 열을 발산시켜 방화했으며 사망자 12명, 부상자 23명의 대형 화재로 번졌다. 사망자 중에는 친부모와 그들의 새 딸도 포함되었다. 곳곳에서 가연성 소재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정작 불이 붙은 원인 자체를 알 수 없어 사건이 미궁에 빠져 있었으나 이능력자까지 수사 범위가 확대되어 용의자로 지목되자 잠적했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정부와 이능력자를 대하는 일반인들의 태도에 대한 반감, 방화사건의 용의자로 쫓기며 필요해진 신변의 보호 등의 이유로 아르미야에 들어갔다. 성격상 마냥 용의자로 쫓기느니 차라리 조직 아래에서 하고 싶은 대로 범죄를 저지르며 살기를 선택한 쪽이기도 하다.

 정확한 본명은 Jill. 지금 이름은 전부 어머니가 지어주셨으며, 성도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아르미야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자신의 본명을 언급하지 않으며, 직접 알고 부르는 사람은 잭 뿐이다. 잠적한 이후로 여태까지 어머니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만큼은 범죄 조직의 일원이 되었음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공지/ 세계관 확인질문] 

다음 문장이 맞으면 Y 틀리면 N을 선택해주세요


1.  노이저의 등급은 타고난 능력의 발현 정도를 의미할 뿐이며,
본인이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실제 전투에서는 급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2. 아르미야 진영에는 돈이 없습니다.
N

3. 그리핀 진영의 팀원들이 착용하고 있는 팔찌는 장기적으로 능력에 의한 수명의 감소를 늦출 수 있으나,
능력의 사용이나 체력 저하에는 큰 영향이 없습니다.
Y



성인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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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지막한 볕이 누이의 속눈썹 사이를 파고들었다. 누이는 꿈결로부터 눈을 떴다.



 뻑뻑하고 따가운 시야 사이에 가장 먼저 든 것은 훤히 방 안을 채운 물결 같은 볕이었다. 출렁거리는 빛의 잔영을 찬찬히 훑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가, 금세 손을 내리곤 다시 부스스 번지는 망울로 눈동자를 옮겼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빛이었다. 다만 조금 안락한 색깔을 띠었다. 잠기운이 한 김 가실 때까지 그렇게 하얀 벽을 반으로 가른 경계선만 쫓으며 누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수면 위로 기포가 떠오르듯 가만 터지는 조그마한 떠오름이 있었다. 별 건 아니었고 이제서야 봄이라는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옷의 두께가 얇아진지는 몇 주나 되었는데 기온과 체온의 간극이 너무 길어 스스로가 둔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부정할 수 없이 봄이었다. 벚꽃은 한참 전에 떨어졌고 벚꽃 그 다음의 꽃들이 핀다. 무슨 꽃들인지 대부분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그 꽃들이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꽃은 활짝도 핀다. 아마 문 열고 내려가면 새삼스럽게 눈이 아파올 정도의 꽃들이 피어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심히 지나쳤던 한 철의 것들. 꿈 같은 색들.


 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요즘 꿈결에서 헤어나는 일이 이상하게도 어려웠다. 잠이 모자란 것 같았다.


 빛을 가로지른 한 가운데 서서 균형을 잡고 느리게 욕실로 걸었다. 미지근한 물을 얼굴에 끼얹어 세수를 하고 물이 튀어 젖은 머리카락을 젖은 손으로 대충 그러모아 묶었다. 그제서야 눈꺼풀이 한층 가벼워져 깜빡이는 감각이 옅어졌다. 오늘은 딱히 정해진 할 일이 없었다. 요즘 대부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한순간 늦잠이나 더 잘 걸, 부질 없는 후회가 바람처럼 스쳤다. 그렇지만 이미 방 밖으로 달아난 잠이 되돌아올 리 없다. 누이는 어질러진 침대 한가운데에 걸터 앉아 막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이 벽에 그려진 빛의 수평선이나 보고 있었다. 조금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아, 그 꽃들, 지기 전에 보러 가야 하는 걸까.


 꿈결에서 다 헤어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달아난 줄 알았던 잠이 슬금슬금 볕을 타고 다시 기어들어왔거나. 어딘가 묘하게 색조가 맞지 않는 스펙트럼을 떠올리곤 그 위에 꽃잎 모양을 대강 덧씌워 보았다. 밖으로 나가서 구경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예쁜가, 아닌가. 잘 모르겠다. 꽃의 예쁨을 좋아하던 게 맞았나 싶을 정도로 알 수 없었다. 다시 나가서 그 보드라운 것들을 눈앞에 대고 들여다보면 기억이 날까? 이것도, 잘 모르겠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한다고 해도 무어라 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아무도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꿈결에 조금 더 푹 잠겨 있기로 했다. 이제까지 빛 속에서 푹 젖어 있던 것처럼.

 언젠가는 여름 볕에 말릴 날이 오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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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 케이트 교수는 언제나 모두의 화젯거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늙고 지적인 교수 그 자체보다는 그 주위를 둘러싼 사건과 사람들이 그랬다. 그의 출신 학교, 주요 요직을 차지한 후배들과 제자들, 그의 손으로 직접 구성된 능력자 집단 더 호라이즌,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아이들―그 중에서도 요즘 단연 화제인 것은 그의 손자손녀인 맥고윈 남매였다. 총명하고도 다정한 소년인 헨리와, 낯을 가리지만 오빠를 닮아 명랑한 소녀 캐럴. 헨리의 죽음은 그를 아는 누구에게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교수가 헨리 맥고윈의 죽음에 관한 조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하는 문건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저에게는 크나큰 슬픔과 비탄을 안겨준 사건이지만, 제 개인적인 감정이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국민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조사는 즉시 중단되었고, 헨리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그렇지만 헨리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를 바람처럼 떠돌고 떠돌아 작은 폭풍이 되어 있었다.

 캐럴라인 맥고윈은 어느새 손끝을 맴돌기 시작한 작은 눈보라를 바닥에 그대로 흘려보냈다. 소금 같은 얼음 결정이 나무로 만들어진 마루에 작은 분수처럼 하얗게 흩어졌다. 캐럴이 만든 눈보라를 시도때도 없이 받아낸 마루바닥은 벌써 몇 번째 새로 공사해 교체된 참이었다. 하녀들은 새 마루를 쓸고 닦으며 아가씨가 능력을 아직도 조절하지 못한다며 수군거렸다. 그날 밤에 캐럴은 온 바닥을 눈으로 새하얗게 덮어버렸다. 아침에 잠을 깨우러 온 하녀는 어안이 벙벙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울 같지?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캐럴이 묻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집사장을 부르겠다며 얼른 걸음을 돌렸다. 결국은 저녁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 소리 들어야 했다. "적당히 하거라." 무얼 적당히 하라는 건지 캐럴은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캐럴은 헨리의 죽음에 관한 조사 중단을 요청하는 문건을 가지고 있었다. 원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서재를 뒤지고 다닐 적에 발견한 것이었는데, 그는 꽤나 고심했는지 문서를 여러 장 고쳐 썼었다. 캐럴은 하나하나 다 읽어 보았다. 하지만 조금 더 공적으로 고친 단어들을 제외하면 내용은 다들 비슷했다. 심지어 뉴스로 대신 들었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캐럴은 그 중 가장 마지막에 쓴 걸로 보이는 것을 몰래 가지고 왔다. 어차피 다시 들춰질 일이 없는 문서들이었다. 제 방 침대에 드러누운 캐럴은 종이를 다시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크나큰 슬픔과 비탄, 캐럴은 이 대목에서 목 울대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 개인적인 감정이, 이어서 가슴께가 내려앉았다. 슬픔은 맞는 단어였다. 사람이 죽는 건 슬픈 일이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눈앞에서 당연히 숨을 쉬고 더해서 말을 하고 웃기까지 하던 사람이 다음 날 시신으로 나타났다면 그게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슬퍼하는게 당연했다. 캐럴이 인정할 수 없는 건 비탄이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비탄하지 않았다. 적어도 캐럴 앞에선 그랬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손자 이름을 되뇌어보지도 않았다. 유품을 정리하며 손을 떨지도 않았다. 손자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그는 분명 슬프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건 조문객과 같은 표정이었다. 캐럴이 헨리의 관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땅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그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올려 캐럴의 눈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아무도 감히 혼자 남은 여동생이 죽은 오빠와 단 둘이 있는 순간을 방해하지 못하던 때였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했고, 헨리의 죽음도 예외는 아니었다.

 헨리가 죽은 이후로 자연스럽게 헨리에게 쏠려 있던 사람들의 이목은 남은 여동생에게로 옮아 갔다. 그래서 헨리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관심이 사그라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캐럴이 더 호라이즌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픈 눈빛을 하고 웃어주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더 호라이즌에 들어간 사람이 '헨리의 여동생'이 아닌 '캐럴 맥고윈'이라는 사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재뉴어리마저도 처음엔 그랬다. ……아니, 아무도는 아니었다. 멜빈이 있었으니까. 그만이 캐럴이 호라이즌에 들어갔을 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건 캐럴 자체에게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지극히 멜빈 리히터다운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그 무관심과는 별개로, 캐럴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 너무 어린 애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캐럴은 한 번도 멜빈의 앞에서 굳이 싫은 티를 낸 적은 없었다. 멜빈도 캐럴이 자기를 싫어하는지 아닌지 전혀 관심 없었겠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헨리의 장례식에서 캐럴 바로 다음에 이름이 불린 인물이었다. 그는 헨리의 생전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마음에…….

 "아가씨, 또 바닥이……."

 한참이나 노크하던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침대 밑에는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캐럴은 한숨을 쉬는 하녀를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문을 넘는 순간 바깥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얼굴에 훅 끼쳤다.


 멜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관 별개로 캐럴은 그의 작업실을 제법 드나들었다. 리첼 스트라우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재뉴어리 정도는 되었다. 물건을 고쳐달라는 이유도, 호라이즌 관련 일 때문도 아니었다. 멜빈은 캐럴이 말없이 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가끔 이유를 물어보긴 했지만 특별히 대답을 안 해도 상관 없었다. 가만히 구석에 앉아 있으면 때로는 하도 작동해서 달아오른 기계를 식혀달라며 느릿하게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기계가 차가운 금속의 온도를 되찾을 동안 캐럴은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어두운 작업실 내부를 열심히 눈을 굴려 살펴보았다. 두 개의 제피,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기계, 죄다 열려 있는 공구 상자, 구석에 처박힌 책장과 서랍, 종이들이 잔뜩 널려있는 책상 위, 그 중 뜯지 않은 전보……

 캐럴이 작업실에 도착할 때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눈을 찔러서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캐럴은 한 번도 노크를 하거나 벨을 울린 적이 없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낡고 무거운 쇠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자마자 기름 냄새와 잉크 냄새와 금속 냄새가 합쳐져 코를 찔렀다. 노을진 바깥에 비하면 밤이 몇 시간은 더 빨리 와버린 듯 어두운 작업실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현관에 서 있다가 이내 발을 떼었다. 어지러이 널브러진 공구와, 미친듯이 휘갈겨 써내간 수식들로 꽉 찬 종이를 밟지 않고 가는 것쯤은 이제 당연했다. 캐럴은 작업실의 한가운데에 도달해서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멜빈은 대개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거나 기계를 만지고 있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멜빈."

 낯간지럽게 이름을 불러보아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멜빈!"

 목소리를 더 크게 해봐도 사방은 조용했다. 그 멜빈 리히터가 작업실에 없다면, 어딜 갔으려나. 캐럴은 다시 사방을 살펴 보았다. 멜빈을 찾는 게 아닌, 이곳에 없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때 책상 쪽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노란색 제피가 캐럴의 음성을 인식하고 부팅된 모양이었다. 네모난 화면 안에 빨간색 사선 불이 두 개 들어온다. 캐럴은 그걸 도저히 눈이라고 생각하기 싫었다. 제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캐럴 앞으로 다가왔다. 균열지고 딱딱한 음성이 제피에게서 흘러나왔다.

 "음성을 인식합니다, 캐럴라인 맥고윈."
 "멜빈은 어디 있어?"

 캐럴은 이 기계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에 아직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검색합니다, 멜빈 리히터― 제피 L 사용자 확인. 반경 15m 내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외출한 거야?"
 "검색합니다, 외출―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외출이 아니라면 어디 갔어?"
 "제피 L 내에서 외출과 유사한 단어가 포함된 영상을 찾았습니다. 작성자, 헨리 맥고윈."

 멜빈 리히터는 헨리 맥고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캐럴은 멜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캐럴은 아까와 비슷하게 목 울대와 가슴께가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기계의 음성이 조합해낸 헨리의 이름은 다른 음성과 마찬가지로 균열이 져 있었다. 사실 헨리가 멜빈에게도 무언가 남기고 갔을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헨리는 캐럴에게 자주 편지나 쪽지를 남겼고, 자그마한 선물도 여러 번 전해주곤 했다. 캐럴은 멜빈의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뜯지 않은 전보들을 떠올렸다.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재생… 해줘."
 "영상을 재생합니다."

 캐럴의 생각은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했었다. 글씨나, 어디서 산 것, 억지나 우연으로라도 찍었을 지 모르는 사진. 캐럴은 헨리가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남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게 헨리가 캐럴에게 남기고 간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편지들, 캐럴이 떠올라 산 작은 목걸이, 어깨를 감싸고 웃으며 찍은 사진. 영상은 편지도 아니었고, 선물도 아니었고, 사진도 아니었다. 영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제피가 영상 로딩을 마치자 붉은 빛이 사라졌다. 캐럴은 덜덜 떨며 화면만 바라보았다. 화면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동안 캐럴의 눈이 거울처럼 비추어졌다. 그리고 일순간,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헨리의 눈.

 "이거 되는 건가? 되는 거 맞지, 제피? 좋아, 멜빈. ……어, 인사해야 되나? 아까도 했는데. 안녕, 멜빈. 아하하, 제피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니. 그런데 도저히 너한테 얘기하는 것 같진 않네. 그냥 제피한테 전해달라고 해야겠어. 어디서부터 얘기하지? 그래, 제피. 내가 계속 여행했던 건 알지? 곧 5년 후의 미래로 갈 거야. 아돌프 박사는 가장 큰 힘을 가지게 되는 집단을 찾아내고, 라파엘이라는 사람에게 그 집단이 어떻게 권력을 가지게 되는지 전하라고 하셨어. 나머지 일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할 거라고……. 난 이 일을 끝으로 시간 여행하는 일을 그만 둘 거야. 신경 안 쓰는 척 하지만 네 주인이 날 은근 걱정하거든. 다음에 보자, 옐로우 키드."

 영상은 그대로 멈추었다. 헨리는 웃고 있었다. 사진에서의 웃음도 아니었고, 기억 속의 웃음도 아니었다. 그건 진짜 헨리였다. 그 순간에 존재했던, 그 순간에 살아 움직이던 헨리.
 캐럴은 도저히 영상을 다시 재생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멈춘 웃음, 그 다음의 영상을 보고 싶었다. 그 다음의 헨리가 보고 싶었다. 다음에 보자. 그 다음이 보고 싶었다. 헨리의 다음. 재생을 끝마치고도 캐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화면의 헨리가 사라지고 붉은 불빛이 다시 들어온다. 그게 끝이었다. 다음이 아닌, 그대로의 끝. 헨리는 캐럴에게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습관처럼 떠난 여행이었고, 습관처럼 돌아올 줄 알았었다. 다음은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캐럴은 제가 썼던 일기를 떠올렸다. "오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약속을 어겼다." 헨리가 약속을 어긴 것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내려앉았던 목 울대가 완전히 부숴진 느낌이었다. 점점 체온은 뜨거워졌지만 반대로 손끝은 아플 정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캐럴은 울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울지 않는다는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약속을 못 지키는 건 지난 여름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캐럴은 틈이 날 때마다 헨리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했다. 캐럴, 하고 부를 때의 목소리, 억양, 표정, 입의 모양을 떠올리려고 애쓴 적이 몇천 번은 되었다. 기억은 캐럴의 머릿속을 바람처럼 떠돌고 떠돌다가 폭풍이 되지 못한 채로 흩어져 버렸다. 캐럴은 헨리가 하는 인사도 떠올릴 수 없었다. 웃는 소리도 떠올릴 수 없었다. 캐럴은 헨리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없었고, 캐럴은 헨리가 웃을 때 눈이 어떻게 접히는지, 입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말할 때 시선을 어떻게 굴리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캐럴은 그랬다. 

 "……언제 왔어?"

 하지만 멜빈 리히터는 다르다.
 그는 헨리가 생전에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언제고 다시 되돌려볼 수 있다. 멜빈 리히터는 헨리 맥고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헨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멜빈이었다. 가장 가까운, 캐럴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헨리가 캐럴에게 해주지 않은 말들, 멜빈은 언제든지 다시 듣고 볼 수 있다. 헨리가 유일하게 멜빈과 캐럴에게 똑같이 남긴 것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거짓말.
 제피가 멜빈에게 먼저 날아갔다. 캐럴은 제피를 따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멜빈은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당황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하다못해 캐럴이 우는 걸 보고 걱정하는 기색도 당연히 없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똑바로 캐럴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었다. 마치 장례식 때의 할아버지처럼, 캐럴과 헨리가 마지막으로 단 둘이 있을 때 감히 끼어들던 그 시선처럼. 그러나 너무나 명백하게, 이번에 끼어든 것은 캐럴이었다. 그게 캐럴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들켰다는 얼굴을 한 것은 멜빈이 아니었다. 캐럴이었다.

 캐럴은 멜빈이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작업실을 나섰다. 멜빈은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옆엔 제피가 있었다. 헨리의 영상을 수십 수천 수만 번은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제피.

 





멜빈 시점의 틈새에서 이어지는 걸로 쓴 글
17살의 캐럴 상상하면서 썼지만 나이는 딱히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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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cked Act





 First Think



 참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탄야 랜킨은 생각했다.


 그는 실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빛이었고, 백색 그 자체였으며, 동시에 초록빛 불을 뿜는 생명이기도 했다. 검은색 렌즈에 가려진 눈동자를 반딧불이 비추어내면, 밤의 장막을 걷는 에오스 같은 우아한 갈색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다 이내 다시 가리워졌다. 그는 그리도 아름다웠다. 온 빛이 그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저기 저 아름다운 청년을 보라며.


 그러니 그가 당연히, 마음에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탄야 랜킨은 소리 없이 웃었다.





 First Act



 데샹이 직접 전갈을 보내는 일은 드물기도 했지만,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미쉘 모나헌은 불안함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예의범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노크부터가 그랬다. 닥터가 만나자고 했어. 자택에서. 이따 저녁에. 급히 내뱉느라 제대로 문장조차 되지 못한 단어들이 툭 발치에 떨어졌다. 하얗게 탄 눈동자가 그 문장들을 좇아 굴러간다. 다음부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하렴, 그렇지 않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쉘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이 내 눈밖에 볼 수 없도록 만들어주마."



 천천히 말을 마치자 미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리도 유약한 기적이라니. 랜킨은 무심하게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불규칙한 발걸음이 덫으로부터 도망치듯 빠르게 빠져나갔다.


 해가 질 무렵, 랜킨은 전갈이 까드득거리며 꼬리를 치켜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유해주는 벌레 떼가 있단다. 아무리 속살거려도 전갈은 들을 수 없을 터였다. 랜킨은 꼿꼿이 선 전갈을 꼬리부터 쥐어 천천히 바스라뜨렸다. 진득한 독이 창백한 손을 씻어내듯 흘러내리다 이내 휘발되어 사라졌다. 데샹 앞에서는 전갈을 풀어 놓을 마음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굳이 녹여버릴 필요까진 없으니까. 그렇지만 가만히 두어서도 안 된다.


 마음에 든 것은 반드시 사로잡아야 해, 손아귀에 넣고 술잔을 기울이듯 천천히 내 속으로 흘려버려야지. 아무도 같은 술을 다신 맛볼 수 없도록.



 /



 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벌레가 나돌아다니기 좋은 밤이로구나.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서 녹아내렸다.


 데샹은 자택 문을 거의 잠가두지 않았다. 초대한 사람이 있어서인지, 본래부터 신경쓰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조차도 없었고. 랜킨은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현관의 불은 언제나 꺼져 있었다. 오직 데샹 자신이 있는 방만 밝혀 놓으니까. 달빛조차 들지 않아 밤의 거리보다도 더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걸었다. 하이힐이 벽에 부딪쳐 초인종 대신이라도 되듯 울렸다. 랜킨은 가장 안쪽 방의 문을 열어제꼈다. 눈이 부시다고 느낄 정도의 밝은 조명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데샹은 여지 없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이쯤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혹은 오히려 언제 들이닥칠지 굳이 예상하지 않았거나. 테이블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그를 지나쳐 등받이가 없는 벨벳 의자에 앉았다. 제법 수수한 척 하는, 그러나 상당한 기술과 재력이 사용된 이 방에서 유일하게 검은색을 가진 것이었다. 데샹이 놓은 가구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조금 기다리겠어?"

 "그렇게 하지."


 랜킨이 생각하건대 이 방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나 데샹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행동에서도, 그의 행보에서도 또한 그랬다.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 뻔한 습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약점을 찔린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뒷모습이나 그림자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랜킨은 그 등을 바라보았다. 바깥 일을 끝내고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도 하얀 가운을 차려 입은 새하얀 등.


 방 안에서 미약하게 울리는 초침 소리가 서른 번을 넘어갈 즈음 랜킨은 일어섰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을 간결하게 정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이힐 소리가 다시금 울리자 데샹은 그제서야 돌아보았다. 자신의 제안에 가까운 부탁을 어긴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겠지. 세 발자국, 랜킨은 덥석 그의 입술을 물었다. 전갈이 꼬리로 적을 쏘는 것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사냥감이 독에 잠겨 잠잠해질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사냥감이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지극히 본능적인 손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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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어



 ……그러니까, 길을.

 버스에서 내내 서 있다가, 도착하기 겨우 두 정거장 전에 잠시 앉았을 뿐인데 그새 곯아떨어졌다. 이봐, 학생. 여기 종점이야. 그것도 버스 기사가 깨워야 할 정도로 아주 깊이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고도 정신은 안 돌아와서 한참이나 좌석에 앉아 그저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옆에선 버스 기사가 많이 피곤했나보다고 혀를 찼다. 결국은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는 느릿느릿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훅 불어닥친다. 옷자락을 끌어모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서서, 주변을 천천히 빙 둘러보았다. 해는 잠들기 전에 이미 져 있었고, 오래된 가로등 몇 개가 인도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일단 앉고 싶어서 정류장에 털썩 주저앉고, 문득 버스 노선도를 봤다.

 처음 듣는 정류장인데. 그러고 보니 여기 종점이라고 했었나……

 아파트 몇 채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듯한, 땅 위의 섬처럼 생긴 곳이었다. 아파트가 없는 곳은 전부 산, 혹은 도로였다. 이런 곳에 아파트가 있는 게 더 이상해…… 여기서는 마트 어떻게 가지. 별 시덥잖은 생각이 들었다. 노선도를 다시 들여다보며 집에서 몇 정거장이나 더 왔는지 세다가, 열 정거장이 넘어가자 그냥 때려쳤다. 어차피 똑같이 시덥잖은 짓이었다. 결론은 하나니까.

 길 잃어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자명한 사실이었는데 막상 머릿속에 문장으로 떠오르니 덜컥 짜증이 치솟았다. 아니면 찬 공기에 정신이 어느샌가 맑아져서 짜증 부릴 정신머리라도 돌아왔든지. 머리를 한바탕 헤집고는 괜히 노선도를 노려봤다. 난생 처음 와본 정류장 이름이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그깟 두 정거장 얼마나 남았다고 그 사이에 앉아서는 처잔 건지.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오늘 처음 쳐보는 피아노로 처음 합주 맞춰보다가 악보 집어던지고 건반에 머리 박을 뻔 했는데 이번엔 처음 와보는 종점에 앉아 있다.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속으로 들끓는 짜증을 풀 곳도 없어 고개만 푹 숙였다.

 집에 가고 싶다.

 딱 봐도 택시가 원하는 때에 올 것 같은 곳은 아니었다. 평소엔 돈 아까워서 그냥 택시도 콜택시도 안 타지만 지금은 돈이고 나발이고 집에나 가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리나, 설마 20분은 아니겠지. 일단은 핸드폰부터 꺼내보는데,

 잔여 배터리 3퍼센트. 충전이 필요합니다.

 "씨발……."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3퍼센트 남은 배터리는 인터넷 접속하자마자 매정하게 2퍼센트로 변하더니 전화를 걸려는 순간 꺼져버렸다. 까맣게 변한 화면을 보다가 문득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도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씨발…… 화면에 흐릿하게 비춰지는 제 얼굴에다 대고 욕을 한 번 더 지껄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처넣었다. 도로에는 지나가는 개미새끼조차 없어 온 사방이 고요했다. 택시든 버스든 올 때까지 죽치고 있어볼까 싶다가도, 일단 이 재수없는 곳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차피 왔을 때의 반대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지. 아, 집에 가고 싶다, 씨발. 오늘 무슨 마가 꼈나.

 시계도 없어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겠고, 한 두 정거장 쯤 지나치는데 갑자기 코끝을 무언가가 툭 하고 쳤다. 움찔 하며 멈춰서는데, 그 코끝을 치던 뭔가가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비가 되었다. 우산…… 같은 거 챙겨 다닐 리가 없다. 처음에는 백팩으로 머리 가리는 시늉이라도 하다가 30초만에 집어치웠다. 어차피 젖는건 똑같은데 팔만 더 아플 뿐이었다. 빨리 걸을 힘도 없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느릿느릿 걸었다. 내가 오늘 뭘 그렇게 잘못했지. 과대새끼한테 욕한 거 외엔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치만 그 새끼가 연주랍시고 하는 짓거리는 당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듣는 건 더했고. 이건 잘못이 아니라 당연한 거다. 아, 맞다. 조율 누가 이따위로 해 놨냐고도 욕했는데 그건 조율이 정말 거지같았기 때문에 역시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면 버스 안에서 잠든 거? 그렇지만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잠이 모자랐다고. 어제 왜 늦게 잤냐면, 당연히 누이가,

 ……관두자.

 빗방울이 얼굴로 들이쳐서 제대로 눈 뜨고 걷기도 힘들었다. 아직 봄이라 밤은 추워 죽겠는데 맨몸에 비까지 맞으니 얼어죽을 것 같았다. 스스로 팔짱을 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젠 여기가 어딘지도 아까의 다섯 배 쯤 모르겠고 그냥 막연히 걷기만 했다. 누이한테 전화하고 싶어도 망할 핸드폰이 꺼진 게 언젠데. 누이가 자기 전에 폰 충전하라고 잔소리할 때 말 들을 걸 그랬다. 혹시 모르니까 우산 챙기고 다니라고 잔소리하던 것도 들을 걸 그랬다. 이제 누이 말 잘 들어야지…… 그런데 말 잘 듣기 전에 여기서 비 맞아 객사할 것 같다. 우산이야 그렇다치고 전화만 됐어도. 전화, 씨발.

 그때였다. 인도를 따라 돌아선 코너에 있던 공중전화에 부딪친 게.

 아 씨발 가지가지하네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공중전화 불빛이 마치 구세주처럼 어두운 빗속에서 환히 빛났다. 아픈 이마를 문지르기도 전에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서 허겁지겁 백팩을 뒤졌다. 지갑에 쓰지도 않고 굴러다니던 동전을 손에 잡히는 대로 전화기에 집어넣고 떠오르는 번호를 거침없이 눌렀다. 누이 번호는 단순해서 외우기 쉬웠다. 너무 오래 외워서 이게 단순한 건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신호음을 들으며 젖은 머리를 미친 듯이 헤집었다. 설마 공중전화라 안 받는 건 아니겠지? 받아라, 제발, 제발 좀……

 "여보세요?"
 "……누이야."
 "쥰이예요? 왜 안 들어와요?"
 "……길 잃어버렸어……."
 "……길을 잃어버려요?"
 "어."
 "어디서요?"
 "버스 타고 잠깐 졸았…… 아니, 그냥 잠들어서 종점까지 갔는데, 택시 부르려고 했더니 배터리가 나갔어. 걸어가려고 했는데…… 비 와서.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두서 없이 설명하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추워서 그런 건지.

 "걸어서 얼마나 갔는데요……?"
 "모르겠어. 한 20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시계 없어서 몰라."
 "근처에 택시 같은 거 안 보여요?"
 "어."
 "혹시 주위에 보이는 가게 같은 거 있어요? 아무 데나."
 "가게는 없고…… 맨션만 보이는데."
 "잠깐만요."

 누이가 말이 없는 동안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검색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딘지 알 것 같은데. 비 아직도 와요?"
 "어……."
 "알았어요. 어디 가지 말고 그 공중 전화기 있는 데에 있어요. 아직도 비 맞고 있어요?"
 "아니, 지금 공중 전화 박스 안이야."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요. 데리러 갈게요!"
 "……얼른 와."

 전화는 급하게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박스 벽에 기댔다가 이내 주저앉았다. 언뜻 벽에 비치는 모양이 딱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옷도 머리카락도 다 축축하게 젖어서 무거운 데다가 춥기까지 했다. 빗방울이 박스를 때리는 소리가 안에서 미친듯이 울렸다. 듣기 싫어서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대충 귀에 꼽았다. 애초에 어디 연결되지도 않은 이어폰이었다. 그 이어폰 단자 끝이 정말 바보같아서 울적해졌다. 지나가는 차 한 대도 놓치지 않으려고 오매불망 밖만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다니는 차가 좀 있긴 했지만 빗속을 쌩하니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잠들면 얼어죽을 것 같아서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전화 끊지 말 걸 그랬다. 아니면 지금 다시 걸어볼까…… 비는 약해질 기미가 없이 더욱 세차게 내렸다. 아직도 찡한 코끝을 문지르는데 차 한 대가 인도 옆에서 급정거했다. 가까이 다가온 헤드라이트에 순간 눈이 부셨다.

 "쥰!"

 차에서 내리는 누이를 보는데 울 뻔했다. 집에서나 입는 옷 위에 가디건 하나 걸치고 온 누이는 우산을 높이 들고 멀지도 않은 거리를 뛰어 왔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천천히 일어서는데 다시 다리 힘이 풀릴 것처럼 비틀거렸다. 누이가 얼른 붙잡아주는데 손이 따뜻했다. 얘 손 원래 이렇게 따뜻했나……. 젖은 머리를 대충 정리해주던 누이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어떡해요, 다 젖었네. 일단 이거라도 입어요."

 자기도 고작 얇은 원피스에 가디건 하나 입고 나왔으면서. 그런데도 어깨에 걸쳐주는 가디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얌전히 서 있다가 그대로 누이를 안았다. 어깨 위로 올라간 팔이 멈칫하더니 이내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렸다.

 "피곤하죠. 얼른 집에 가요."
 "응……."
 "많이 걱정했어요? 길 잃어버려서?"
 "응……."

 사실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감기 걸리겠다. 집에 가서 따뜻한 거 해줄게요."

 누이 팔을 붙들고 반쯤 부축받아서 겨우 차에 탔다. 제 가디건을 다시 꼼꼼히 덮어준 누이도 다시 차에 탔다. 차 안 공기는 따뜻하고, 표현 그대로 포근했다. 구조됐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누이는 운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힐끔거리며 히터 온도를 높였다. 한 숨 자요, 피곤할텐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감았다.

 "쥰, 다 왔어요. 일어나요."

 이거 아까랑 비슷한 상황 같은데…… 하지만 눈을 떠보니 익숙한 주차장에 와 있었다. 누이가 손수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먼저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줄 때까지도 멍하니 있었다. 어서 올라가자고 누이가 손을 잡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자다 깨서 그런지 어지러웠다. 그대로 누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따뜻한 손이 등 위로 올라와 토닥인다.

 "어린 애 다 됐네요……."
 "어……."

 오는 동안 누이 가디건은 반쯤 젖고 옷은 반쯤 말라 있었다. 비는 그대로였다. 누이가 들고 다니던 물색 우산 아래에, 둘이 딱 붙어 걸었다. 힘이 없어서 느리고 좁은 보폭을 누이가 맞췄다. 정신 없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려서, 누이가 문을 열어준 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나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일단 무거운 몸을 침대든 소파든 아무데나 누이려는데 누이가 막아섰다.

 "지금 누우면 바로 잠들 거예요. 일단 샤워부터 해요. 감기 안 걸리게. 물 받아줄게요."

 신신당부를 하고는 욕실로 데려가서 변기 위에 앉히더니 물을 받기 시작한다. 뜨거운 김이 욕실에 가득 찼다. 물 온도를 재느라고 욕조 안으로 숙인 누이 뒷모습을 보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누이야."
 "응. 왜요."
 "사랑해……."
 "나도 사랑하니까 얼른 씻고 나와요."

 핫초코 만들어 줄게요. 누이는 아마 까치집이 됐을 머리를 쓰다듬고는 웃으며 욕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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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럿은 천천히 고개를 늘어뜨렸다. 양갈래로 낮게 묶어낸 머리카락이 샛노란 우비 위로 쓸리는 소리가 귓가에 어슴푸레 들렸다. 사각, 삭, 사악. 뱀이 기어가는 소리. 문득 뱀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드렉슬러 아저씨의 서재에서 커다란 사전을 읽다가 본 사진에서 마주친 눈이었다. 흐릿한 잉크로는 애초에 표현할 수 없었을 것 같은, 가늠할 수 없는 늪처럼 시커먼 눈. 이빨이 아닌 그 시커먼 색에 독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네가, 회사의 그 '격류'야?"
 "네? 네……."
 
 삐딱하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정적을 베어내자 샬럿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억 속이 아닌 눈앞에서 마주한 그의 눈은 뱀의 눈과 정반대로 하얗게 불타버린 재와 같은 빛이었다. 그 강력한 염동력 때문에 어릴 때 눈동자가 타버렸다는 소문은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소문 중에서도 손꼽히게 유명했다. 글쎄, 샬럿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은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재였을 것 같았다. 가진 능력과는 상관 없이 본래부터 그 모습이었을 법한, 책에서 봤던 그 뱀처럼 눈에 진득한 독을 품은 사람. 샬럿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종이에 인쇄된 사진처럼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뭐하자는 거야?"

 그가 불쾌한 듯 말했다. 그제서야 샬럿은 그의 눈이 아닌 다른 것까지 보았다. 잘 세공된 바늘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물방울이 그의 왼쪽 눈동자 바로 앞에 멈추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눈을 찌를 듯 했다. 물방울이 거슬리는 듯 그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여전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거만하게 고개를 든 채 서 있었다. 미세하게 진동하던 물방울은 샬럿이 천천히 손을 거두자 맥없이 분사되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눈에 물기가 들어간 듯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이윽고 씨익 웃었다.

 "너랑 놀면 재밌겠네."
 "…저랑 놀려구요?"
 "왜? 놀면 안 돼?"
 "아니요……."

 샬럿이 느릿하게 반문하자 낮게 들떠있던 그의 목소리가 곧바로 삐뚤어졌다. 마치 어른에게 허락받지 못한 어린 애처럼.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샬럿 또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압적이었다. 샬럿이 아는 또래 중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마를렌 언니.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힘을 타고난 사람.
 무언가 맘에 안 드는 듯 입꼬리를 비틀고 샬럿을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그에게, 샬럿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안그래도 작은 목소리가 더 기어들어갔다.

 "우리, 싸우려고 만난 거잖아요…… 어?"

 순간 지나가던 바람이 샬럿의 어깨를 뒤로 세게 밀어붙였다. 아니, 바람이 그럴 수 있을리가 없는데? 미처 판단을 마치기도 전에 샬럿은 흙먼지 속에 넘어져 있었다. 거친 땅에 손바닥이 약간 긁히고 골반과 엉덩이가 저릿하더니 이내 통증이 몰려왔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지 못하는 샬럿에게 그가 척척 걸어오더니, 바로 앞에 털썩 앉곤 턱을 괴었다. 샬럿은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몸을 뒤로 뺐다. 그는 손이라도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샬럿의 눈을 똑바로 맞추곤 웃음기가 만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자며?"

 적어도 마를렌 언니는 이 정도로 유치하진 않다. 이건 거의 8살 수준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 샬럿은 한발짝 물러섰다. 가까이서 보니 두 뼘이 넘는 키 차이가 꽤 실감이 났다. 염동력으로 시허옇게 타오르는 눈동자와 거만한 시선, 눈가에 어렴풋이 진 그림자와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세세히 들어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하는 싸움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우산을 펼쳐도 몸의 반은 흠뻑 젖게 되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샬럿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제가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건 아니에요."

 반은 맞고, 반은 애매한 말이었다. 회사, 정확히는 크루그먼 이사님이 지시한 임무였고,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소문의 그 '경이'를 눈앞에 마주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설레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마를렌 언니를 떠올리게 했던 순간부터 샬럿의 기분은 조금씩 삐걱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샬럿의 기분 따위는 애초에 읽으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난 아닌데? 싸우고 싶거든, 너랑."
 "……비구름 좀 그릴게요."

 먹구름이 휘청이며 모여들더니 일순간 그와 샬럿의 머리 위를 덮었다. 빛이 차단되고 이내 장대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샬럿은 우비의 모자를 얼른 뒤집어썼다. 우산까지 펼치고 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비가 내리든 말든 그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비는 그를 전혀 적시지 못하고 있었다.

 "비 따위는 재미 없어. 다른 건?'
 "이건 준비 같은 거예요."

  샬럿이 설명하자 그는 제법 흥미롭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샬럿은 땅을 흠뻑 적신 비가 더이상 스며들 곳이 없어 흐르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준비해두지 않으면 이 주변은 분명 지나치게 지저분해질게 뻔했다. '조용히, 깨끗하게', 임무를 지시할 때마다 크루그먼 이사님이 강조하는 단어였다. 샬럿 역시도 잔해가 잔뜩 남는 싸움은 좋아하지 않았다. 우산도 펼치고 싶었지만 그의 앞에서 그럴 여유까지 부릴 만한 배짱은 없었다. 그는 빗속에서도 젖지 않아 마치 신과도 비슷해 보였다. 샬럿은 심기가 꼬이는 걸 느꼈다.

 "좀 젖어주세요."

 샬럿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옷이 물에 푹 젖어 몸에 여지없이 들러붙었고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순간 당황한 듯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양손 중 왼손을 꺼내어 휘둘렀다. 하지만 스스로가 여전히 비를 맞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그는 샬럿을 노려보았다.

 "너, 이거 어떤 옷인줄은 알고."
 "딱 봐도 우비는 아니네요."
 "누나가 오늘 아침에 다려준 옷이란 말이야!"
 
 짜증내며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터는 모습이 영락 없는…… 애새끼였다. 샬럿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 비웃음 가득한 얼굴을 구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너, 가만 안 둬."

 뒷통수를 묵직하게 때려오는 통증에 이번엔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순간 귀가 멍멍해져서, 땅에 부딪치는 빗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검게 흐려졌다가 느리게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곧바로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가 웅덩이로 패대기쳐졌다. 아까 넘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다리가 비틀려 힘이 들어가질 않았고, 갈비뼈가 부러진 것마냥 순간 숨이 막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마저도 비가 얼굴에 들이쳐서 숨을 쉬는 건지 물을 먹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미처 자신을 덮쳐온 힘을 인지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꼴 좋다."

 의기양양한 그의 목소리에 샬럿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왼손 검지를 까딱거리자 염동력이 샬럿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발버둥치는게 무색할 정도로 끌려가는 모양새가 가벼웠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수갑에 묶여서 그의 발치까지 끌려갔다. 손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다리에 땅에 끌려 생채기가 생겼다. 엷은 핏물이 샬럿의 발치에 흘렀다. 그는 아까와 같이 털썩 앉더니 샬럿의 턱을 잡곤 억지로 눈을 맞췄다.

 "더 기게 해줄까?"
 "……."
 "왜, 벌써 겁 먹었어?"

 순간 그 눈을 짓이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샬럿은 어느새 수갑이 풀린 오른손을 그의 눈에 갖다대었다.

 "……눈에 불이 났네."
 "뭐?"
 "불, 꺼줄게요."
 "너, 뭐하는…… 이 손 안 치워?!"

 샬럿이 주먹을 채 쥐기도 전에 그가 기겁하며 샬럿을 뿌리쳤다. 마치 눈알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양손으로 왼눈을 부여잡았다. 샬럿은 펼쳐진 제 손바닥을 거두곤 일어섰다. 비가 상처를 쓸어대서 다리가 온통 피로 젖고 쓰라렸다. 조금 더 내려야겠어. 기운 없이 손가락을 휘두르자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그리고는 땅으로 흘러든 피를 거두어 흘렀다.

 "그 정도론 그냥 충혈된 정도일 거예요."
 "……너……."
 "양손, 드디어 꺼냈네요."
 
 그가 양손을 내리자 온 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변한 그의 왼쪽 눈이 드러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하얗게 타 있던 눈동자는 붉은 흰자위에 둘러싸여 애처로워 보였다. 그의 얼굴에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표정이 서려 있었다. ……공포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분노했다고 하기엔 수그러든 빛.
 두려움. 두려움과 비슷한 빛이었다.

 "너무 지저분해서 쓰지 않기로 했지만…… 죄송해요."

 처음부터 흐르는 물을 다루었으니 그 정도는 이제 자면서도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물을 비틀어내는 방법을 익힌 것도, 흐르는 물만 다루려니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임무에서 사용해보니 장마 같은 비구름으로도 몇 시간을 씻어내야 할 정도로 현장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탓에 쓰지 않은지가 벌써 몇 년이었다. 아마 지금 그의 나이 때였을 것이다. 몇 년만이더라도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수정체나 망막은 그대로인 채 흰자위의 핏줄만 모조리 터뜨린 게 스스로도 조금 신기했다. 아니, 아마 그건 샬럿의 실력이 아니라 그의 실력일 것이다. 옷에 집중하는 신경은 느슨하더라도, 제 몸 구석구석은 예민하게 제어하는 능력. 타오르는 눈동자를 처음 마주친 다음으로 그의 코드네임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듯 멍해져 있었다. 이제는 끝나지 않는 소나기같은 비를 온몸으로 다 맞으면서. 샬럿은 조용히 그의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딱히 덧붙일 말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그 입에서 이젠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입이 일그러지며 호선을 그었을 때 눈을 깜빡였다. 착각인 줄 알았다.

 "술래잡기 시작이야."

 불이 꺼진 붉은 눈에서 새로이 타오르는 빛은 다름아닌 희열이었다.
 샬럿은 문득 비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소나기가 아니라, 장마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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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민트, 이름 그대로 사과향이 나는 민트다. 보통의 민트보다 순하고 달콤한 향이 나서 차로 많이 마시고, 요리에도 많이 사용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꽃도 핀다. 희고, 조그맣고, 종잇조각 찢어 구겨놓고 뭉쳐놓은 듯한 모양이다. (더 로맨틱하게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꽃말은 민트 공통의 꽃말인 '다시 한 번 사랑하고 싶습니다'와, 애플민트만의 꽃말인 미덕.


미덕.


아마 그 미덕에 애플민트 껌을 짝짝 씹는 일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의미 불명의 파티에 오는 일도, 그 파티의 가장 구석자리에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까부터 스테이지에서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샴페인인지 뭔지를 터뜨리더니 이젠 그걸 몸에 부어 가며 춤을 추고 있다. 그 여자애들의 행태를 관찰하듯 유심히 살피는 일도 미덕은 아닐 것 같다. 이곳에서 미덕을 실천하려면 당장 여길 빠져나가 112에 전화를 걸어 미성년자들이 술과 마약에 쩔어 있다고 신고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냥 집 가서 엄마한테 시험 망했다고 자백하든지. (내 성적도 미덕에 미포함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플민트 껌을 씹고 있다고 해서 굳이 그 꽃말을 실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쪽이 더 정신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이 파티가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정신이 나가다 못해 있던 정신도 소멸할 수준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후 4시부터 판 깔고 시작했다던 파티는 이미 내가 도착한 저녁 즈음엔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따가운 조명 아래에 이미 한 무더기의 미성년자들이 약에 쩔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이 파티를 아주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일탈과 청춘이라는 시시하고 지루한 명제 아래에 자신의 젊은 육체를 아낌없이 내다버리는 것이다. 아주 멍청하고 도발적인 짓이다. (그 도발적이란 단어조차 식상해진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내가 이 하등 쓸모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에서 구석에 콕 처박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여길 비웃는 일은 꿈꾸다가도 할 수 있다. 방금 춤추던 여자애들이 테이블에서 비싸 보이는 양주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고 나서 다들 진득하게 킬킬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것도 약을 탄 게 틀림 없다. 8명의 손을 탄 술병이 마지막 손으로 옮겨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양주는 그대로 곱게 원래 자리에 다시 놓아졌다.


아무도 마지막 타자가 그 술을 마시지 않은 걸 신경쓰지 않는다. 혹은 모르거나. 어차피 머리 바로 위에 달린 저 기괴한 조명 때문에 서로 얼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혼자만 쏙 빠진 마지막 타자는 스테이지로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내리더니 아까의 정신 나간 얼굴은 어디 가고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이질적이라고 표현한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차분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내가 앉은 곳은 이 클럽의 구조 탓에 조명이 벽에 막혀 눈에 잘 띄지 않는 말 그대로 구석이었다. 일종의 관객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이지와 이 소파 사이에는 각종 테이블과 술병과 사람이 엉켜 있다. 그 사이를 뚫고 눈이 마주쳤다고 하면... 답이 없다. 그 많은 장애물을 아주 유연하게 비켜가면서 이쪽으로 척척 걸어오는 걸음이 또박또박하기도 하다. 나는 버리기 귀찮아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껌종이를 꺼내 단물 다 빠진 껌을 뱉곤 아무 데나 집어던졌다. 은색 껌종이도 사뿐히 피하는 걸음.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 온다.



"재밌어요?"
"...아니."



이치하라 누이가 피식 웃었다.



"거기 그러고 있을거면 여기 왜 왔어요?"
"초대받아서."
"초대? 누구한테?"
"우리 반 반장. 타케야마."
"아, 그 등신."
"그래도 선배님인데 그렇게 막 불러도 되냐."



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일단 그 새끼는 등신이 맞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익숙한 얼굴을 꽤 많이 봐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치하라는 대번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등신."



내가 반응을 안 해주니 또 혼자 피식 웃는다.



"재미없네요."
"누가."
"선배님이요."



넌 꽤 재미있는데,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여기 물 없어요? 이치하라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어디선가 음료수 병을 찾아왔다. 레몬 탄산수. 뚜껑을 열고 서슴치 않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아까랑은 영 달랐다.



"뭔 줄 알고 마셔."
"탄산수요. 마실래요?"
"아니."
"약 안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
"비밀."



다 마신 병을 가까운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그 위에서 또 뭘 찾는다. 안에 투명한 액체가 반쯤 남은 주사기를 집어들더니, 그대로 플라스틱 뚜껑 위에 박아넣는다. 피스톨이 끝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주사기를 바닥 어딘가로 집어던졌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보여서 조금 감탄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하는 건데?"
"재밌으라고요. 선배님 마실래요?"
"안 마셔."
"그러니까 재미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너도 별반 다를 거 없지 않냐."



새초롬하고 맑은 얼굴빛, 여기선 찾아볼 수 없는 안색이다. 이치하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는 여태껏 지켜보고 있었던 스테이지 위의 여자애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정신 나갔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약에 술에 취해 있던 애들. 단 한 명 빼고.
샴페인을 먼저 딴 건 이치하라였다. 이윽고 다들 그걸 머리 위에 붓고 난리를 치느라 흠뻑 젖은 꼴이 됐는데 이치하라의 옷은 새하얀데도 젖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자기가 무슨 꼴인지도 모르고 춤을 추는 와중에도 이치하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손으로 빗어내렸고, 때로 속내가 훤히 보이는 남자들이 올라올 때마다 웃으며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향했다. 조명이 너무 밝고 눈에 띄어서, 사진에 찍힐까봐 다들 슬금슬금 피하는 곳. 하지만 저기서 사진을 찍히면 오히려 얼굴이 조명 때문에 하얗게 날아갈 거란 생각까지 할 정신머리가 있는 인간은 여기에 몇 없다.




"그래서, 시험 끝날 때마다 이렇게 개차반처럼 노는 거야?"
"아니요?"
"처음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시험이랑 상관 없이 2주에 한 번씩."
"약 해?"
"안 해요. 내가 미쳤다고?"



등신, 이라고 말하던 눈빛으로 다시 날 본다.



"그럴거면 굳이 여기서 안 놀아도 되지 않냐?"
"나 훈계하려고 온 거 아니죠?"
"그냥 궁금해서."
"이유 그런 거 없어요. 여기가 제일 재밌거든요."



그러더니 내 눈앞에 오른손을 들어보인다.



"첫째, 취하지 말 것."
"뭐하냐."
"둘째,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
"..."
"셋째. 마음껏 즐길 것."



세 손가락이 접힌 손을 만족스러운 듯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득 다시 껌이 당겼고,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껌 씹을래?"
"응."



그리곤 내가 내밀기도 전에 손에서 쏙 빼가 입에 넣는다. 애플민트 향이 약하게 감돈다.



"그럼 난 다시 갈래요."
"어딜."
"스테이지."



점점 말이 짧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껌을 씹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이치하라는 인사도 없이 바로 스테이지를 향해 돌아섰다. 흰색 프릴이 달린, 보통 여자애들은 데이트 할 때나 입을 법한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린다. 나는 껌을 입에 넣었다. 달고 화한 애플민트 향이 입안에 다시 가득 찬다. 미덕, 그 꽃말을 다시 떠올린다. 미덕, 이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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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은 바다처럼 일렁인다. 누이는 이제 많이 익숙해졌다.
 쪽빛,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닷빛이 가장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바다에 물결이라도 치는 듯 밝은 라일락 빛이 스며들어 있다. 이건 아마도 쥰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 일정한 박자라도 있는 듯 사르르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빛, 목마른 숨소리가 담긴 짙은 크랜베리 빛이 조심스럽게 바다 아래에 잠겨 있다. 매번 꿈을 꿀 때마다 그 붉은 빛이 점점 블루베리의 보랏빛으로 바래가고 있다.
 꿈꿀 때 의식이 있는 게 피곤하다거나 불편하다고 여겨본 적은 드물었다. 어차피 딱히 내용이 있는 꿈도 아니고, 악몽도 꾸지 않는다. 꿈은 누이의 의식 아래 완벽하게 조종된다. 깨어있을 때와 다름없이, 그저 잠시 독백을 하는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부터 누이는 조금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잠이 부족하거나 얕아서 생기는 피곤함이 아니라…… 이 대목에서 항상 누이는 더 형용하지 못해 독백을 멈추었다. 어쩌면 그 형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피곤함일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색들은 규칙적이다. 바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누이가 잘 때 쥰이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 자고 있어도 다 볼 수 있다. 거기서 네가 어리다고 하는 거야, ……라고 누이는 쥰에게 말하지 못했다. 바다가 아닌 다른 빛이 떠오른다면 악몽이라고 느낄 쪽은 누이니까.

 바다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다. 무거운 먹빛의 절벽에 서서 지켜본다.
 그런데 순간 그 바다가, ……스펙트럼에 산란되는 듯 부서지기 시작한다.

 쪽빛은 점점 기지개를 켜는 듯 하더니 이내 눈부신 상아색으로 뒤집힌다. 라일락 빛은 어느새 멈추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꽃의 형상을 닮은 맑은 흰색이 채운다. 누이는 제 눈을 비볐다. 꿈인 걸 알면서도 눈을 비볐다. 그래도 색은 부서짐을 멈추지 않았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가 섞여 있는 듯하던 깊은 심해가, 덜 읽은 복숭아의 쓰고 단단한 분홍빛으로. 먹색의 절벽이, 풀비린내 나는 찬란한 녹빛으로. 누이는 어느새 바다가 아니라 덜 자랐음에도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래서 눈을 떴다. 너무 놀라서.
 눈을 떠 보니 쥰이 저쪽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야……."
 "깼어?"
 "너 그거…… 다시 해 봐."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보던 쥰이 이해 못했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악보를 한 장 넘기는 소리에서, 그 라일락 색이 다시 스쳐지났다. 건반 위로 올라가다가 가볍게 부딪친 손끝에서, 메이플 시럽의 맑은 갈색이 비쳤다.

 그리고 누이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니,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부드러운 상아색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펼쳐지는 색들. 꿈이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색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자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실로 짜내듯 단단하게 얽혀서 어지러이 흩어지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듯 눈앞에서 반짝거린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누이는 저도 모르게 그 색들에게 손을 뻗어 보았다. 빛과 똑같이 잡히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누이의 눈에 보일 뿐이었다. 무게 없이 부유하는 색들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린다. 그리고 그 빈틈 사이에, 쥰이 치고 있는 피아노와 같은 맑고 우아한 건반의 색이 차오른다. 높은 음의 소리에서 햇볕의 색이, 낮은 음의 소리에서 노을의 색이 진다. 너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이 순간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듯 선명하게.

 연주가 끝나고 불시에 색들이 사라졌을 때에도 누이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뭐라고 말이 없자 돌아본 쥰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이는 그제야 비로소 꿈에서 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서, 다시 바다의 색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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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이었다. 첫눈은 이미 한참 전에 온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머지 않아 채 녹지도 못한 더러운 눈 위로 질척거리는 비가 내렸다. 비였다가, 다시 눈이었다가, 이내는 진눈깨비가 되었다. 마를 날 없을 것처럼 구는 하늘은 성에 낀 창문처럼 희끄무레했다. 볼은 얼어 따갑고 손끝은 감각이 없었다. 교복 위에 겹쳐 입은 외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의 폭과 반경이 좁아졌다. 발걸음 옮기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사실은 귀찮은 계절. 그 귀찮음이야말로 겨울이었다. 한 겨울.

 그리도 귀찮은 계절에, 이치하라 누이가 사람을 죽인다.


당신 앞의 살인자


 1. One Day


 아니, 이미 죽였다.

 누이의 시야는 오로지 텅 빈 하늘로 꽉 차있다. 보기만 해도 손끝이 시려오는 철제 난간만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굳이 내려다 볼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머리가 깨지고 온 몸이 기괴하게 비틀려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텐데 누이는 그런 걸 전혀 못 보는 성정이었다. B급 공포영화에서 피가 튀는 식상한 장면조차 견디지 못하는 비위를 가지고 있는데 화면이 아닌 진짜를 볼 수 있을리가 없지. 문득 생각의 연쇄를 타고, 눈 가리고 겨우 봤던 그 피 튀기는 장면이 떠올랐다. 피 튀긴다고는 해도 이제 거의 잊어버려서 떠올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느낌이었더라, 시뻘겋고, 찐득거리고, 더럽고, 역겨웠지.

 이치하라 누이가 그렇게 사람을 죽였다.

 사실 보질 않았으니 진짜로 그렇게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이프로 난도질 당하는 것과 5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비슷한 죽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죽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모습이든 죽음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이고, 이번에는 그 죽음을 누이가 만들었다. 죽음을 만든 사람, 죽인 사람, 그래, 살인자. 살인자다.

 이치하라 누이는 이 순간부터, 아니, 그 손을 놓았을 때부터 살인자이다.

 살인자라는 단어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그 3분 이후 누이가 스스로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순간은, 다부진 발걸음으로 두어 걸음 척척 걸어가 차갑고 딱딱한 난간을 ―착각인지 현실인지 모를 미온이 남은― 손으로 꽉 쥐고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이다. 단순히 비위가 약하다는 이유로 보지 않을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자마자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닥을 느리게 흘러가는 피의 양을 눈대중으로 어렴풋이 가늠해보는 동안 비위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감지도 못한 눈동자가 흐린 하늘을 향해 있다. 마지막으로 본 하늘이 저따위라니. 누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우 그치나 싶었던 진눈깨비가 지금 당장 내리기라도 할 듯했다. 누이는 다시 시체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비하면 눈이 아프게 느껴질 정도의 선명하고 진득한 붉은 색, 눈을 깜빡였다.

 그도 눈을 깜빡였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넥타이의 색깔은 짙은 초록색, 3학년. 누이의 목에는 저 피보다 밝은 빛의 리본이 매어져 있다. 누이는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이목구비가 정확히 보이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깜빡.
 눈이 마주쳤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눈이 깜빡이는 걸 알아봤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제 눈이 깜빡이는 걸 잘못 알았거나. 하지만 누이는 그 깜빡임 사이에 묘한 금이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벽이 벌어진 틈에서 시멘트 모래가 파스스 떨어지는 듯한, 건조한 시선의 연결. 그는 누이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시체로부터는 채 열 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시체에서 흐른 피는 그의 발치를 향한 방향으로 스며들고 있다.

 문득 눈앞에 굵은 눈송이 하나가 휘날려 떨어져갔다.

 누이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러나 시선은 고정한 채로 천천히 물러섰다. 금방 그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앞에 흘려졌던 눈송이는 그와 가까운 곳 어딘가에 떨어졌을 것이다. 혹은 시체 위로 내려앉아 핏물에 녹아내렸거나. 누이의 코끝과 발등에도 눈송이가 하나씩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금세 녹아버렸다. 공기가 얼어붙은 듯 사방은 고요하다. 눈송이에게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뺨이 따가웠다.

 누이는 옥상에서 도망쳤다.



 2. The Day


 소문은 누이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또다른 것들 중 하나였다.

 수없는 소문이 귀를 찔러댔다. 어차피 남들에게 다 들릴 걸 알면서도 의미없이 낮게 내려깐 목소리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단어들. 누이는 참지 못하고 교실을 나섰지만 당연히 학교 안에서 사람을 없는 곳을 찾는게 더 힘들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손을 씻고 있으니 거울에 소리가 반사되는 것 같았다. 물을 사방에 다 튈 정도로 세게 틀어놓으니 치맛자락이 젖었다.


 그래서, 걔 뭐래?
 근데 자살하겠다고 원래도 존나 나댔잖아. 누가 진짜 죽겠다고 생각하냐.
 좀 불쌍하긴 하다. 또라이같긴 했는데…….
 걔 우울증 있었대. 자살하겠다고 한 것도 다 우울증 때문이라고.


 결국 수업 종이 치고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을 때, 누이는 화장실 구석 칸에서 토할 수밖에 없었다. 비위가 극도로 상한 탓이었다. 먹은 것도 없어 나오는 것도 없었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위액인지 침인지조차 모를 것만 꾸역꾸역 뱉어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입에서 비린내가 났다. 한 차례 입을 헹구고는 이미 수업이 시작된 교실을 뒤로 하고 양호실로 갔다. 웬일인지 확인증조차 받지 않고 바로 침대를 내어 주었다. 손수 이불을 펴 주는 양호 선생의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양호실은 따뜻했고, 이불까지 덮으니 금방 잠이 왔다.

 깜빡.

 눈을 떴을 때 양호 선생은 잠시 나갔는지 없었다. 30분 남짓의 얕은 잠이었는데도 개운했다. 누이는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놓고, 양호 일지까지 기록한 후 다시 교실로 향했다. 복도로 가던 중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교실에서 다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발걸음이 가뿐했다.

 다시 그 아이를 죽이는 꿈을 꾼 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붉은 꿈.

 청소 시간은 급히 끝났고, 이내 종례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착실히 자리에 앉아 담임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 명도 자리에서 빠지지 않은게 드물다 싶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담임 선생이 들어왔다. 그는 묵직한 눈빛에 굳게 다문 입을 잠시 깨물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문을 말하는, 낮은 목소리. 다시 귓가에서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조문을 가고 싶은 아이들은 주소를 알려주마.

 그것으로, 종례는 끝이었다.



 3. That Day


 누이는 조문을 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다. 누군가가 살인자라며 자신의 목을 잡아챌까봐.
 그리고 그런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암묵적으로 아이는 자살한 것으로 결론난 모양이었다. 자살하고 싶다는 메시지 기록은 차고 넘쳤다. 요즘 방에서 나오는 법도 없고 대화한 적도 없었다는 부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는 몇몇 가까웠던 아이들의 증언과 아이의 교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분실되었던 옥상 열쇠, 중앙 계단에 설치된 CCTV에서 발견된 혼자 옥상을 올라가는 장면까지. 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은 1학년 남학생이었다. 시체의 목격자는 시체가 이송될 때까지 그 주위에 몰려들어 있던 학생들 전부였다. 눈이 조금 쌓여 일시적으로 피가 하얗게 덮였던 블록은 다음 날 바로 교체되었다.
 자살한 아이의 장례식이라는 이유로 2일장으로 치뤄진 장례에는 아이의 생전 친구들과 선생들이 조문을 갔다. 살아있을 적엔 손에 꼽는 문제아로 꽤나 손가락질 받았던 아이는 많은 사람들의 추모와 애도를 받고 갔다. 부모는 여전히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두어번 실신했다며 장례식에 다녀온 아이들이 말했다. 다들 죽은 아이를 불쌍히 여겼고, 자살했다는 것을 속으로는 섬짓하게 느꼈다. 한동안 학교는 물에 침잠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도 이치하라 누이를 살인자라고 지목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그 아이는 확실히 꼼꼼했던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는 누이가 조달해주던 물건들을 항상 학교에 두었다. 누이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집에 흔적을 남기는 것에 비하면 학교에 남긴 흔적은 훨씬 치우기 쉬웠다. 누이는 아이의 사물함 비밀 번호를 알고 있었고, 아직 남아 있던 물건들을 몽땅 수거했다. 부모는 부검을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약물의 흔적 따위가 남아있는지 아닌지는 이제 알 도리가 없다. 아이는 화장되어 고운 뼛가루로 납골당에 안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기적이라고 표현하려면 다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하지만 기적에 가까웠다. 누이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는 습관이 들어 있었고, 후관은 건물이 낙후되어 서쪽에는 복도 끝 CCTV 외에는 다른 CCTV가 없었다. 아이의 마약 중독 증세는 신기할 정도로 우울증과 닮아 있었다. 뭐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아이의 습관도 그랬다. 통화기록 어디에도 누이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누이는 아이와 얼굴을 맞대거나 둘이 직접 주고받는 쪽지로만 이야기했다. 그 철저함이 이런 곳까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구역질이 났다. 누이는 장례식이 끝난 후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말하자면 누이가 의심받을 구석조차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3학년은 2학년보다 종례가 늦었다. 누이는 그가 자습을 하진 않을까 싶어서 3학년 복도에서 죽치고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종례가 시작되기도 전에 반을 나섰다. 자기보다 얼핏 10cm는 더 큰 키에,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너무 선명한 그 지루한 얼굴을 금방 알아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눈이 마주쳤든 말든 누이를 지나쳐 걸었다. 누이는 저보다 반 걸음은 더 큰 보폭을 일정한 간격을 놓고 쫓아갔다. 그리고 본관 건물을 나섰을 때, 그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깜빡, 눈이 한 번 깜빡였다.


 "왜 말 안 했어요."
 "내가?"
 "봤잖아, 내가 죽인 거."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의 말투는 그가 하고 있는 눈빛만큼이나 지루하고 느렸다. 1학년과 2학년은 이미 하교했고, 3학년은 아직 종례가 끝나지 않아 사방은 고요했다. 그날처럼. 누이는 가벼운 무게로 말을 이었다. 그 역시 별 것 아니라는 듯 짧게 대답했다.


 "끝까지 모른 척 해줄 거 아니면,"
 "뭘."
 "그냥 지금 가서 말해줘요."
 "그러니까 뭘."
 "내가 도망치기 전에."


 겨울 해는 당연하다는 듯 일찍 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빠른 속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순간 그 앞에 하얀 것이 스쳤는데 그게 번뜩이는 빛인지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누이가 그 하얀색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는 처음으로 길게 말했다.


 "뭘 얘기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럼 네가 직접 자백해." 


 누이는 간만에 소문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스친 것은 정말로 눈이었던 모양인지 정수리에 무언가가 차게 닿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니 완전한 눈이 아닌 진눈깨비였다. 차가운 물방울이 묻어난 손끝을 치마에 터는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복 바지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일순간 교내에서 잘도 그런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생각이었다.


 "난 비겁해서 자백은 못하거든."
 "그럼 나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요?"
 "모르겠는데."


 소문을 말하지 않는 대신 완전히 말이 안 통한다. 누이는 약간 학을 떼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끝까지 모른 척 해줄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하얀 담배연기를 뱉었다. 연기는 진눈깨비와 탁한 겨울의 공기색과 섞여 허공에 짙고 진득하게 감겨들었다. 누이는 참을성있게 기다렸고, 그 연기가 겨우 바람에 휩쓸려 흩어질 즈음에야 그가 다시 말했다.


 "난 성가신 건 질색이야."


 누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손에 든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곤 제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도 피워?"
 "잠깐 피우다 끊었었어요. 냄새를 숨길 수가 없어서."


 그 질문은 좀 바보같았다.

 어쨌든 어느 쪽도 학교 안에서 할 짓은 아니지. 흡연과, 살인. 누이는 학교에서 하면 안 되는 짓들을 더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리곤 담배를 두어 모금 피우고는 다시 건넸다. 그는 받지 않았다. 누이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시 담배를 물며 말했다.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안 믿을게요."
 "……."
 "좋을 대로 하세요."


 깜빡. 확실히 그의 눈이었다.

 누이는 반 정도 태운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이제 슬슬 3학년들이 나타날 시간이다. 본관 창에 비치는 그림자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저리도 흐릿한 그림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있는데, 왜 아이가 죽은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할까요. 누이는 굳이 입으로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그랬듯이. 문득 그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마키하라 쥰. 파스스 부서지는 금과 같은 눈빛을 가진, 혹은 그런 눈빛을 짓게 만드는. 아니, 어쩌면 누이 때문에 그런 눈빛을 짓게 된.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이는 반 정도는 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이는 살인자고, 그는 목격자니까. 시체의 목격자 말고, 살인의 목격자. 유일한 목격자.

 이윽고 알고 있던 대로 3학년이 하나 둘 본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누이는 그날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앞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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