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좋아해?
"글쎄?"
"그닥."
―딸기 좋아해?
"어."
"난 그냥 그런데. 생딸기 아니면 싫어요."
"그냥 달잖아. 먹을만 한데."
―우유에 빠진 딸기 좋아해?
"……그게 뭐야?"
우유에 빠진 딸기
"이달의 맛이네. 먹어볼래요?"
"맘대로."
바닐라랑, 민트초코랑, 처음 먹어보는 우유에 빠진 딸기. 그렇게 파인트를 채웠다.
"민트초코 싫대도."
"이제 적응될 때도 됐잖아."
"적응돼도 싫은 건 싫은거예요."
누이는 부루퉁하게 말하면서도 민트초코 먼저 한 입 떠먹었다. 이젠 치약이라기보단 박하사탕과 비슷한, 어쨌든 입안 화하게 시원한 향이 가득 찬다. 딱딱한 초콜릿 칩이 소리를 내면서 씹힌다. 하도 먹고, 비슷한 향의 꽃을 토하다보니 쥰의 말대로 적응이 되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좋아한다기보단 그저 적응했을 뿐이지만. 쥰은 우유에 빠진 딸기 먼저 먹었다.
"맛있네."
"맛있어요?"
"그런데 좀…… 밍밍해."
풉. 누이는 순간 입안에 있던 무언가를 뿜을 뻔 했다.
"왜, 또 수국 나오려고 해?"
"아니, 웃겨서요."
밍밍하다는 그 단어의 어감이, 생각보다 훨씬 안 어울려서. 혹은 너무 잘 어울리거나. 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잘도 아이스크림은 퍼먹는다. 누이도 한 입 먹어보았다. 부드럽고, 적당히 단 우유맛 사이로 씹히는 딸기 과육. 나쁘지 않았다.
"진짜 맛있네."
"응."
정말 맛있어서, 한동안 먹기만 하느라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연애도 딱 그 맛이었다. 맛있어서 가끔 말조차 나오지 않는 맛.
그러니까, 그 볕 좋은 날 복도에서의 고백은 성공했고, 쥰과 누이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애, 간지러운 말이었다. 여태까지 토하던 꽃잎의 결처럼…… 아, 이렇게 표현하면 쥰은 조금 뚱한 표정을 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둘의 연애도 간지러웠다.
간지럽다. 이제 슬슬 찬 기운이 녹아들어오는 바람도, 덥지 않을 정도로 내리쬐는 햇볕도, 하교길에 잡은 손과 가끔 마주치는 시선과 점심 시간마다 냅다 서로의 반으로 향하다가 1관과 2관 사이에서 만나 멈추는 발걸음 모두 간지러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간지러운 건 말로 표현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안 지 1년이 막 넘어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가끔 견딜 수 없어서 좋아한다고 한 마디 던지듯이 말하는 게 누이는 그렇게 간지러웠다.
"좋아한다는 말 자주 안 해서 그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연애를 시작했는데도 꽃을 토한다고 벌벌 떨며 이야기했더니 쥰은 대뜸 저렇게 대답했다.
복도에서 고백 받고 그날 점심을 같이 먹고 같이 처음 손잡고 하교한 날 누이는 집에서 다시 꽃을 토했다. 변함없는 민트향 나는 수국이었다. 누이의 머릿속에도 아플 정도로 맵게 화한 민트향이 쫙 퍼지는 기분이었다. 짝사랑하느라고 못잔 잠 다 자려고 했더니 걱정하느라 또 잠을 못 잤다. 쥰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일주일을 그렇게 수면 부족으로 보내다가 결국은 하교길에 손잡고 줄줄 다 말해버렸다.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고 중얼중얼 말하는데 문득 그림자가 길어지는 게 보였다. 그렇게 눈으로 보기에 한 뼘인가, 길어지는 그림자만 세고 있었더니 난데없이 나온 대답은, 좋아한다는 말 자주 안해서 그렇다고.
근데 더 놀라운 건 그게 정답이란 사실이었다.
"당연히 몸 안에 자랐던 꽃은 남아있잖니?"
"……그렇구나……."
"꽃핵이 더 자라거나 하진 않으니까, 이미 핀 꽃들만 토하고 나면 괜찮아질거야."
"그럼 다 토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에요?"
"뭐, 그렇지. 감정에 자극이 있으면 좀 더 자주 토하기도 하니까…… 이건 너희끼리 알아서 해 보렴."
완전히 정답은 아니고 반 정도만 정답이었다. 보건 선생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쥰은 딱히 놀라지도 않은 모양새였다.
"감정에 자극이란 게 뭘까요."
"좋아한다는 말 안 해서 그렇다니까."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물어봤더니 또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누이는 샐쭉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좋아해. 됐어요?"
"어."
가나다라 말하듯 어투 없이 말해도 좋아해 한 마디면 쥰에게는 다 되는 것 같다.
"이게 무슨 감정에 자극이 돼. 아니, 그것보다 내가 자극받아야 돼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내가 좋아한단 소릴 들어야 자극이 되지. 쥰이 해줘요."
"좋아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아무 말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니 쥰이 슬쩍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너, 얼굴 빨개졌다. 자극 확실히 됐나보네. 누이는 아닌 척 아이스크림만 다시 퍼먹었다. 민트초코의 시원한 향이 열기를 좀 날려주길 바라면서.
"……엣취."
그리고 자극받은 열기에 수국이 퐁 하고 튀어나온다. 다 토해내야 하는 것들이니 나오는 게 좋긴 한데 어쩐지 타이밍이 원망스러웠다. 누이가 미처 손으로 막아내지 못해 아이스크림 위에 떨어진 수국을 쥰이 스푼으로 우유에 빠진 딸기와 함께 떠서 들었다.
"민트향 난다, 이거."
"나도 알아요……."
그러더니 쏙 하고 제 입에 넣는다.
"왜 먹어 그걸!"
"아무 맛 안 나는데. 우유맛만 나."
"아니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왜 먹느냐고요!"
"민트향 나는 우유맛인데. 맛있어."
"민트향 나는 우유맛인데. 맛있어."
놀라서 빼액 하고 소리지르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무덤덤한 표정이다. 괜히 또 누이만 혼자 부끄러워서 난리친 꼴이 됐다. 그래도 그게 그 '감정에 자극'이라도 되었는지, 엣취 하는 재채기와 함께 한 송이 두 송이 수국이 계속 새어나왔다. 쥰이 또 먹을까봐 양손으로 입 꼭꼭 가리고 뱉어냈다. 그래도 덩이로는 나오지 않는게 꽃이 많이 줄은 모양이었다. 누이는 조심스럽게 꽃잎들을 냅킨에 싸서 테이블 한 구석에 밀어놓았다.
"왜 숨겨, 그걸."
"……내 맘이에요."
"내 꽃이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그게 왜 쥰 꽃이야. 내가 고생해서 토한 걸."
"나 때문에 핀 꽃이니까 내 꽃이지."
"……그런 게 어디있어요."
"나 좋아서 핀 거 아니야?"
맞는 말이긴 했는데 간만에 밉다고 해주고 싶었다.
"그럼 내 꽃은 어디 갔어."
"니 꽃?"
"내 라넌큘러스 있잖아요."
쥰은 누이와 다르게 연애를 시작한 후에는 꽃을 거의 토하지 않았다. 아니, 한 번도 토하는 모습을 다시 못 봤다. 연애 전에도 그렇게나 잘 숨겼으니 딱히 못 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지만…… 왠지 지는 기분이었다. 연애에 지는 게 어딨느냐고 하면 또 할 말 없지만 괜히 자기만 치부를 자꾸 아무 때나 퐁퐁 내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쥰이 나 좋아해서 핀 노란색 라넌큘러스."
"……."
작정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니 또 모르는 척. 파인트 한 통이 거의 다 비어간다. 누이는 얼마 먹지도 못했다.
"감정에 자극을 줘 봐. 그럼 나올지도 모르지."
"진짜요?"
이번엔 의욕적으로 반문하니 쥰이 퍽 재미있다는 듯 먹던 스푼을 내려놓고 턱을 괸다. 이거 핀트가 뭔가 잘못된 거 알까? 말해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방금 전까진 좋아한다 한 마디에 얼굴이 그렇게나 빨개져선 놀라서 눈도 커졌으면서.
"음…… 좋아해요."
"자극 안 되는데. 다시."
"언젠 좋아한단 말을 안 해서 그렇다면서요."
"그러게. 그런데 자극이 안 되는 걸 어쩌냐."
"쥰, 좋아해."
"다시."
"좋아해요."
여태까지 들었던 좋아해 소릴 다 합쳐도 오늘 들은 만큼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하니까 꽃이 안 올라오지."
"진짜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에요."
"그럼 어쩔 수 없고. 꽃 다 토했나보지, 뭐."
그러자 누이 표정이 실망에 늘어진다. 눈꼬리도, 입꼬리도, 살짝 봉긋하던 광대도, 들떠있던 어깨도 다. 누이는 체념하고 다시 남은 아이스크림이나 먹었다. 다 토했으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저런 재미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좋아한다는 말 한 번만 더 하면 또 얼굴 폭발할 것 같았다. 민트초코는 어쩌다보니 누이가 다 먹었고 색을 구분할 수 없는 바닐라와 섞인 우유에 빠진 딸기만 남아 있었다. 싱거운 듯 단 맛…… 평범한 우유 안에 들어간 딸기가 제법 잘 어울리는. 누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쥰."
"어."
"사랑해?"
……딸꾹.
"어, 성공했다."
누이의 광대가 다시 봉긋 솟아오른다. 입꼬리도, 눈꼬리도, 어깨도. 쥰의 입에서 딸꾹질과 함께 살포시 튀어나온 연노란색 라넌큘러스 꽃잎 한 장. 하늘하늘 떨어져서 사뿐히 누이의 스푼 위에 올라앉는다. 여전히 바나나향이 가득하다. 누이는 가볍게 스푼을 입에 넣었다. 파핑캔디처럼 톡톡 튀는 꽃잎에서 나는 바나나향이 우유맛 아이스크림과 섞여서 더 달콤한 맛이 났다.
"바나나향 나요."
"……너……."
"왜, 싫어요?"
심드렁하던 표정에 딸기빛이 조금 물들어 있다.
"……아니, 좋아."
내 얼굴도 딸기빛이겠네…… 웃는 입 속에서 수국 한 송이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