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좋아해?
"어."
―파핑캔디 좋아해?
"그럭저럭."
―파핑파핑 바나나 좋아해?
"그건……"
파핑파핑 바나나
"싫어!"
쥰은 순간 멈추어 섰다. 왜 그러느냐고 같이 걷던 타카하타가 돌아보았다.
"……아이스크림 사줄까?"
"아이스크림이요?"
"사줄게. 가자."
"사줄게. 가자."
멀뚱멀뚱 자리에 서서 되묻는 타카하타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배스킨라빈스로 들어간다. 경쾌한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 어서 오세요. 온통 분홍색으로 꾸며진 눈아플 정도의 아이스크림 매장. 요란한 색의 서른가지인지 서른 한가지인지 하여튼 여러가지 아이스크림이 조명 아래 늘어져 있다. 그리고 그 앞을 조명만큼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여고생이 두 명 있다. 쥰은 그 한발짝 옆에 섰다.
"파핑파핑 바나나."
"콜."
파핑파핑…… 여고생들은 쥰의 존재를 눈치 못챈 듯 점원에게 유치한 아이스크림 이름을 불러 주었다. 바닐라, 체리 쥬빌레, 파핑파핑 바나나.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간지러울 정도의 이름들이다. 그래도 바닐라는 아주 좋아하는 쪽이고, 체리도 뭐 그럭저럭. 그런데 싫어, 라고 말하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단어가 좀 낯설다. 먹은 지도 꽤 오래돼서 맛도 잘 기억 안 나는, 입안에서 폭죽 터뜨리는, 그래, 이름 그대로 파핑파핑하는 그거.
그거 좋아하는구나.
"어, 이치하라다."
늦게서야 뒤따라 들어온 타카하타가 이름을 하나 부르자 지갑을 꺼내던 여고생이 뒤돌아보았다. 어깨에 걸쳐 얼굴을 가리던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리며 거두어졌다. 새하얀 가운데 볼만 발그레한 얼굴이 드러난다.
"타카하타네."
"아이스크림 먹으러 왔어?"
"응. 너도?"
누이는 쥰을 돌아보지도 않고 타카하타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데 쥰의 기분은 점점 삐딱해져만 간다. 그래서 기분처럼 자세도 삐딱하게 짚고 섰다.
"난 안 보이냐, 후배."
결국 불만스럽게 끼어드니 그제야 이쪽을 돌아보곤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제가 일부러 인사 안 한 게 아니에요."
어딘가 거슬리는 느낌. 누이의 선배님 소리에 자그마한 파핑캔디가 하나 콕 박혀 있다. 분명히 별 느낌 없는 말투인데, 괜히 단 것 안에 들어서 혀 아프게 하는 그런 파핑캔디처럼. 쥰이 아무 대답이 없자 누이가 슬그머니 덧붙인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그나저나 너 왜 변명하고 있는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다가 문득 제 인상이 안 좋아져 있다는 걸 진열대에 비춰진 자기 얼굴 보고 알았다. 얼른 인상을 푸는데 누가 인사해서 봤더니 아키야였다. 그러고보니 둘이 같은 궁도부였나. 아키야는 타카하타랑도 아는 사이인지 익숙하게 말을 붙여 왔다. 그나저나 방금 쟤 표정에 뭐가 스쳐지나간 것 같은데. 누이의 표정은 변화 없어 보이는 척 휙휙 바뀌어서 가끔 알아보기 힘들다.
"뭐 먹을까요?"
"민트초코."
일부러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싫다고 말하던 그 얼굴이 되돌아온다. 미간 구기지, 또. 누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키야는 같이 먹자고 제안한다. 가리키는 손끝에 걸린 포스터에 뭐라고 적혀 있는데 딱히 읽지는 않았고. 타카하타는 이런 제안에 거절 잘 안하고 쥰 역시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아키야가 맛 하나씩 고르라는 말에도 단호하게 민트초코라고 답했더니,
"민트초코 싫어. 치약맛 난단 말이에요."
바로 반동이 온다.
"치약맛 아닌데."
"치약맛이지, 그게. 딴 거 먹어요."
도대체 그게 왜 치약맛이야. 서서히 제 표정도 구겨진다.
"딴 거 생각 안 나는데."
"그런 게 어딨어. 여기 맛이 몇 가진데요."
"내 맘이야."
말꼬리 계속 물고 늘어지는게 유치한 건 알겠는데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더 유치한 말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너도 먹고 싶은 거 넣었잖아. 그…… 바나나."
"그게 뭐요."
"나도 그거 싫어하는데 넣었잖아."
"내가 그걸 선배가 싫어하는지 어떻게 알아."
"나도 니가 민트초코 싫어하는지 어떻게 알겠냐."
"……."
"서로 맛 하나씩 교환한 셈 쳐."
누이는 할 말이 없는 듯 쥰만 노려보았다. 이겼네, 이겼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짓말 해서 그런가. 사실 파핑파핑 바나나 안 싫어해. 입에서 톡톡 튀는 맛이 어색하긴 해도, 그럭저럭 먹을만 하다. 굳이 골라 먹진 않더라도 먹으라고 하면 잘 먹는다. 그런데 괜히 싫다고 거짓말까지 해서 누이를 이겨먹은 건, 글쎄…… 잘 모르겠다.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이층으로 올라가니 썰렁했다. 아이스크림 스푼도 유치한 분홍색. 민트초코만 노랗고 하얗고 분홍색인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유난히 튀는 밝은 청록색이었다. 쥰은 괜히 바닐라도 피하고 체리 쥬빌레도 피하고 타카하타의 뉴욕치즈케이크도 피하고 누이의 파핑파핑 바나나까지 피해서 민트초코만 퍼먹었다. 시원하고, 입이 상쾌한 단 맛. 그런데 어쩐지 원래 먹던 그 맛이 안난다. 다른 아이스크림이랑 섞여서 그런가…… 그런데 누이가 중얼거린다.
"치약맛……."
"아닌데."
이것도 반동. 쥰은 수업시간에 졸던 중에 어렴풋이 들었던 단어를 복습하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아픈 시선이 느껴진다.
"민트에서 바나나맛 나."
"그래서 싫어요?"
누이도 쥰만큼 반동이 빨랐다. 파열음 날 것 같은 목소리. 순간 입안이 톡톡 튀었다. 파핑캔디를 씹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안 싫은데."
"난 민트 싫어요."
싫다고 그만 좀 말하면 안 되나. 이제 슬슬 배가 쿡쿡 쑤셔온다. 저놈의 싫다 소리 오늘따라 몇 번째 듣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결국에는 아키야가 누이를 말려서 싸움인지 뭔지 애매한 분위기는 일단락됐다. 쥰은 여전히 민트초코만 퍼먹었다. 그런데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맛이 점점 달라진다. 상쾌하고 단 맛에서, 점점 상쾌함이 매운 맛으로 바뀌더니, 단 맛이 사라지고 초콜릿 특유의 씁쓸한 뒷맛만.
다 썼다. 아이스크림도, 이 분위기도.
겨우 배스킨라빈스 나오니 날이 저무려는 듯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아키야와 타카하타는 일찌감치 헤어졌다. 그나마 떠들던 그 둘이 가버리니 완전히 얼음장같은 분위기가 됐다. 여름은 그래도 끝나려면 좀 남은 것 같은데…… 누이는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쥰도 딱히 말 붙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또 아까처럼 괜한 말이 튀어나올까봐. 그래서 싫다는 말 또 들을까봐. 시내에서 멀어지니 점점 소음이 사라져서 조용해졌다. 이정도 걸었으면 기분 괜찮아졌을까 싶어 표정을 살짝 훔쳐봤더니, ……또, 또. 미간 구겨졌다. 이쯤되면 착잡해진다.
"잘 가요."
"어."
전혀 잘 가란 표정이 아닌데. 오히려 가다가 발병나란 표정이다. 더 건드리지 않는게 좋겠다 싶어 손 한 번 흔들고 먼저 돌아섰다. 그런데 등이 따갑다. 해 반대 방향으로 걸어와서 그런 건지, 네 미운 털이 박혀서 그런 건지.
혹시 파핑캔디가 등에 박혀 있나.
집에 오자마자 쥰은 다녀왔습니다 한 마디 하곤 쌩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노을이 비추는 방에, 산호색 꽃뭉텅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이젠 익숙하게 툭툭 발로 대충 치우기만 한다. 어차피 청소해봤자 다음 날이면 똑같이 꽃밭이 되니까 청소하는 의미가 없었다. 꽃 크기도 엄청 커서, 몇 송이만 토해놔도 엄청 지저분해 보인다. 그래도 처음 토할 땐 그 몇 송이 토하고 말더니 이젠 거의 꽃다발 수준으로 튀어나온다. 이거 다 묶어서 꽃다발로 선물했으면 몇 다발을 줬을까. 쥰은 침대에 누워 가장 가까이 있던 꽃 한 송이를 집어들었다. 얇고 부드러운 꽃잎이 풍성하게 둘러싸인, 꽤 예쁜 꽃. 이름은 좀 복잡하지만. 라넌큘러스……
걔가 라넌큘러스 닮았나. 얼굴이 희멀건해서 하얀 꽃을 더 닮은 것 같은데. 하긴 볼은 발그레해서 산호색이 돌기도 한다.
노을이 짙어지고 방이 어두워지면서 꽃의 색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오늘 그 표정들처럼. 잘 웃어주지도 않으면서 가끔 그렇게 짜증낼 때 홱 지나가는 표정들은 제법 다양하다. 알아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알아보기 힘든데 짜증까지 내는 표정 말고 그냥 좀 편하게 웃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다. 유독 자기한테만 웃는 얼굴이 드문 것도 그렇고. 꽃은 이렇게들 활짝 피는데 넌 왜 안 피어줘. 게다가 꽃은 싫다는 말도 안 한다. 여러모로 꽃보다 나은 게 없다.
……아닌가. 꽃은 싫다는 말 안하는 대신 다른 말도 안 하긴 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인가 싶어 꽃을 내던지고 한숨을 쉬었다. 파스스, 꽃잎끼리 스치는 소리.
―싫어!
그 말, 그러니까 그 입모양에 우뚝 서버린 건 아마 그 순간 튀어나오려던 꽃이 들어가 버려서.
왜 하필이면 알아봐도 그 말이지. 뭘 싫다고 했는지는 못 들었지만 분명 민트초코였을 것이다. 민트초코…… 오늘 먹은 건 맛이 없었지. 맨날 잘만 먹던 단맛이 오늘따라 왜 맛이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아예 모를 일은 아니지만. 이상하잖아, 아이스크림 취향 하나 다른 게 그렇게 신경쓰일 일인가. 민트초코 싫을 수도 있지. 싫을 수도…… 한숨이 또 나온다. 그런데 이번엔 한숨이랑, 다른 것도 같이. 쥰은 순간 진짜로 토할 뻔 했다. 입안에서 엄청 까칠하고 따가운 게 굴러다닌다. 파핑캔디 한 숟가락 먹은 것처럼. 얼른 손을 입에 대어 뱉어냈다. 그게 꽃인지 알아보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새에 방이 완전히 어두워져서.
꽃 색이 바뀌었다. 쥰은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연노란색, 그리고,
"파핑파핑 바나나……"
그 싫어한다고 거짓말한 바나나 향.
꽃의 색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밤새 내내 토하느라 잠도 못 잤다. 게다가 꽃잎이 무슨 수세미마냥 까칠거려서 입안이 헐 것 같았다. 그놈의 파핑캔디. 싫어한다고 뻥쳤던게 점점 뻥이 아니게 되어간다. 토해낸 꽃들은 침대나 방바닥에 굴러다니며 있는 대로 쥰을 귀찮게 했다. 게다가 전엔 향도 별로 안 나더니 웬걸. 딱 그 아이스크림마냥 달콤한 바나나 향이 몸에 밸 정도로 향이 짙어졌다. 학교 도착하자마자 냅다 보건실로 가서 약을 챙겨 먹었다. 때마침 출근한 보건 선생이 웃으며 인사했다.
"아침부터 짝사랑?"
저 보건 선생은 처음엔 꽤 걱정하는 듯 하더니 이젠 짝사랑으로 놀려먹기 바빴다. 학생보다 더 늦게 출근하시네요. 한 마디 했더니 네가 너무 일찍 온 거라고 받아친다. 일찍 오긴 했다. 약 먹으려고.
"근데 왜 노란색 약 먹고 있어?"
"……꽃 색이 바뀌기도 해요?"
"아니?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던 보건 선생이 눈을 빛내며 시선을 돌려온다. 쥰은 딱히 대답 없이 약 먹기 전에 토한 꽃 한 송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침햇빛 받아 뽀얀 빛이 도는 연노란색 라넌큘러스.
"어제부터요."
"이젠 향기도 나네. 이거 무슨 향이더라……."
바나나요. 차마 말로 하진 못했다.
"근데 이거 꽃잎 원래 이렇게 까슬거렸니?"
"그것도 어제부터요."
"아프겠네."
전혀 걱정하는 어조 없이 보건 선생은 웃으며 꽃을 집어들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관찰했다. 신기하네, 역시 어린 애들 사랑이라 이렇게 꽃이 바뀌기도 하나. 무슨 로망인진 몰라도 보건 선생은 '어린 애들의 짝사랑'이란 주제에 참 관심이 많아 보였다. 본인은 어릴 때 공부만 했다나 뭐라나 하여튼 그랬는데 쥰은 로망이고 나발이고 입안 헐어 죽을 것 같았다. 토한 꽃 안 보이는 데다가 버리라고 해도 가끔은 대놓고 꽃병에 꽂아 놓기까지 했다.
"근데 이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네."
"뭐가요."
"이것도 몸에서 자라는 거잖니? 갑자기 바뀌었는데 좋을 리가 없잖아."
그런가. 하지만 입 헐어서 아픈 거 빼면 딱히 변한 것도 없었다.
"조심하렴."
뭘 조심해야 할까요. 꽃? 짝사랑? 파핑캔디?
그리고 꽃 토하느라 밤 샌 보상으로, 수업시간 내내 잤다. 종례 때까지 자고 있었더니 담임이 분필 던져 깨웠다.
"수업은 안 들어도 종례는 좀 들어라."
그런데 그게 종례 끝이었다. 아이들은 삽시간에 와르르 빠져나갔다. 담임은 웃으며 자기가 던진 분필 줍고는 말했다. 잠은 집에서 좀 자고 와. 쥰은 귀찮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잠 다 깨고는 피아노 치러 음악실로 향했다. 명목은 합창부 연습이긴 한데, 쥰은 자기가 피아노 치는 데에 합창부 애들이 노래를 하든 춤을 추든 딱히 상관 없었다. 관현악부는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 소리들이 너무 커서 피아노에만 집중하기 힘들다. 그나마 사람 목소리는 피아노 음색을 묻을 정도로 힘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합창부로 들어왔다. 그냥 피아노만 칠 수 있으면 상관 없었다. 축제 연습은 좀 성가시고 가끔 나가는 합창대회 반주는 아침에 일어나기 짜증나긴 하지만 어쨌든 피아노를 치니까 괜찮았다.
그러고보니 걔도 피아노 치면서 처음 만났지.
작년 축제 때였다. 그날 뭘 했는지 다른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냥 좀 정신없이 있다가 무대 올라가래서 올라가고 평소처럼 피아노를 쳤다. 강당은 음향이 별로라 무대에서 피아노 치면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연주하면서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중간에 곡이 잠깐 끊길 때 스피커를 한 번 노려보는데, 그 스피커 너머에서 멍하니 이쪽만 쳐다보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지. 입 벌리고 강당에 사람이 몰려서 더웠는지 얼굴은 불그스름한데, 그 얼굴이 더워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붉다는 건 좀 나중에 알긴 했지만, 하여튼 피아노 처음 보는 어린애처럼 마냥 순진한 표정 짓고 있던 여자애가. 그 표정을 그때 이후로 절대 안 보여줄 걸 알았으면 좀 오래 볼 걸 그랬다. 그 다음에 만난 건 축제 끝나고 몇 달이나 지난 딱 작년 이맘때 쯤이었는데, 마치 그런 표정 보여준 적 없다는 듯 새치름한 얼굴을 하고 먼저 인사했었다.
―이치하라 누이.
꽃 토하기까지 딱 세 시간 걸렸었다. 이름 알고 집에 가서 낮잠자다가 문득 꿈에서 그 멍한 얼굴을 다시 보기까지.
그런데 그 꽃이 어제 바뀌었지. 처음 너한테 거짓말한 그날에.
……아니, 처음은 아닌가.
연습 끝나고 나니 어제 집 갈 때처럼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음악실 나와서 2학년 교실 있는 2관을 빙 돌아서 궁도장 쪽으로 한 번 더 돌았다. 별 이유 있는 습관은 아니었다. 그냥 언젠가부터 그렇게 걷는다. 진짜 다른 맘 있는 건 아니었다.
진짜야, 진짜라니까.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고, 그러니까.
누이는 못 볼 거라도 본 듯 눈이 커다래져선 놀란 표정이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교복 단정히 입던 애가 목에 리본도 없이 우뚝 멈춰서선 거의 황망해보일 지경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설마 어제 짜증이 아직도 안 풀렸나 싶어 말을 걸까 말까 하는데,
에취.
"……야."
"……."
"너 입에서 꽃 나오는데."
그 애 입에서 난데없이 푸른색 자그마한 꽃 두 송이가 터져나왔다.
보건 선생은 아마 이 학교에서 가장 빨리 퇴근할 것이다. 월급도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도움될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꽃 무슨 색이냐."
괜히 알면서도 물어봤다. 하늘색이요. 목소리에서 자기도 놀란 게 묻어난다. 하늘색…… 자신이 꺼내먹던 약통 옆에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약통을 새로 열었다. 하늘색 알약들이 한 번도 손닿은 적 없는 듯 그득 쌓여 있다. 손에 한 번 쏟아 두 알 골라내어 누이의 손 위에 얹어 주었다. 이미 하얀 손바닥 위에 푸른 꽃들이 조그마한 꽃밭처럼 피어 있다. 쥰은 제 방의 꽃밭을 떠올렸다.
"그거 먹으면 세네 시간은 괜찮아."
"선배 되게 잘 아네요."
어. 누구 덕분에…… 라곤 역시 말 못했다.
누이는 울적한 듯 입꼬리를 끌어내리고는 그 하늘색 알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삼켰다. 쥰은 옆에 있던 물병에서 물을 한 컵 따라 건네주었다. 얌전히 받아들고는 약 먹기가 힘든지 인상을 찡그리고 꿀꺽 소리도 크게 마신다. 쥰은 약통을 대충 정리해 넣어놓고는 보건 선생이 근무 대신 책상 위에 놓고 간 보건 일지를 펼쳤다. 2-A 이치하라 누이, ……감기. 보건 선생은 항상 감기라고 쓰곤 했다. 그러고보니 위에 있는 기록 중 반은 3학년 C반 마키하라 쥰이 감기약 먹었다는 기록이다. 누가 보면 감기가 불치병인 줄 알겠다. 보건 일지를 덮고 누이 건너편 침대에 앉았다.
"너 누구 좋아해?"
"좋아하니까 토하겠죠……."
아니 그건 나도 엄청 잘 아는데 그러니까 누굴. 점점 기분이 복잡해진다. 잠시 정적. 그러더니 누이가 제가 토한 꽃잎들을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보건 선생이 하던 짓이다.
"그건 왜 주워."
"누가 보면 안 되잖아요."
"난 어차피 봤는데."
그 말을 하는데 꽃도 없는 입 안 혀가 까칠했다.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누이는 째려보기나 한다. 왜 나만 째려봐 저게 진짜. 지금 정말 심경 복잡한게 누군지도 모르고. 하여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새치름한 짓만 엄청 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 새치름한 얼굴에 울적함까지 얹어져 있어서……
……달래줘야 할 것 같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대답이 없다.
"사 올게. 여기 있어, 어디 가지 말고."
혹시 그새 어디로 도망갈까봐 당부하곤 보건실을 나섰다.
편의점까지는 10분 조금 안 되게 걸렸다. 그러고보니 누이의 아이스크림 취향을 아는 게 없었다. 파핑파핑 바나나같은 게 편의점에 있을 리는 없고…… 그러고보니 어제 바닐라 넣었으니 그만하라고 아키야가 말렸었지.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뒤적거리면서 바닐라 맛 뭔가를 찾는데 민트색 선명한 포장지의 콘 아이스크림이 손에 잡혔다. 민트초코 콘.
"……."
이거 사들고 가면 분명히 등에 또 파핑캔디 박힐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청개구리처럼 두 개 계산해 버린 건 단순한 심술 비슷한 감정에서였다. 싫어한다고, 싫어하면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난 좋은데 넌 싫을 수도 있지. 이해해.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러니 민트초코 사가는 건 어제 일을 까먹어서도 아니고 니가 이걸 좋아해줬으면 하는 맘도 아니고 그냥 심술이다. 장난도 아니고 심술. 유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 파핑캔디 하나가 아니라 백 개가 등에 박혀도 뭐, 심술 한 번 부린 대가라고 치지 뭐. 쥰은 계산하자마자 콘 하나의 포장을 까서 입에 물었다. 헌 입안을 시원하게 가라앉히는 민트향.
보건실로 돌아가니 누이는 얌전하게 나올 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서는 양손 활짝 펼치고 꽃을 들고 있었다. 어디 가지 말란 말이 한치도 움직이지 말란 말은 아니었는데 말 잘 듣는 걸 처음 보는 기분이어서 좀 웃겼다. 그런데 웃었더니 웃지 말라고 톡 쏜다. 어련하시겠어. 봉지에서 아이스크림 꺼내 내미는데 받을 손이 여전히 꽃밭이다. 그리고 얼굴은…… 어제보단 덜한 표정.
"나 민트초코에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요."
"파핑파핑 바나나 같은 건 편의점에 안 팔아."
"아니 그건 그렇겠지만 왜 굳이 민트초코야. 그건 안 파는데 이건 파는 게 더 이상해요."
"그래서, 안 먹어?"
"나 이거 어떻게 해요."
신기하게 안 먹는다 소리는 또 안 한다. 손 아래에 봉지를 받쳐 주었더니 살살 꽃잎을 털어낸다. 쥰이 꽃을 대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왜 안 버렸어."
"……몰라요."
아이스크림 까는 표정이 어째 영 좋지 않다. 점점 울적함이 차지하는 면적이 커지더니 아예 얼굴 전체를 덮는다. 꽃 토하는 거 나한테 들킨 게 울고 싶을 정도의 일인가, 아니면 민트초코 또 먹는 게 그 정도로 싫은 일인가.
"야, 울지 마."
심술을 제대로 부리긴 한 것 같은데 반동이 이런 모양이니 엄청 잘못한 것 같다. 그래서 또 아무 말 못하고 아이스크림만 먹고 앉아 있었다. 싫다 소리 또 들을까봐. 파핑캔디 백 개보다 그게 더 싫다. 누이도 별 말 없이 아이스크림만 계속 먹었다. 유달리 진한 민트향만 났다.
결국 어제랑 다를 것 없이 아무 말 없이 보건실을 나섰다. 중간에 궁도장에 놓고 온 게 있다길래 따라가줬더니 리본을 놓고 온 거였다. 2학년을 나타내는 빨간색 리본. 하교길인데도 가지런히 매고는 다시 걸었다.
아, 기분 복잡하다.
파란색 꽃, 어디서 많이 보긴 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자신의 것과는 다르게 작고, 여리게 생겼고, 종이로 정성들여 접은 듯 반듯하게 생긴 꽃이었다. 향기는 민트향에 묻힌 건지 원래 향이 없는 건지 잘 안 났고…… 어쨌든 중요한 건 꽃이 아니라, 꽃이 피게 된 이유였다. 꽃이 피게 된 이유…… 당연히 짝사랑이겠지. 짝사랑이 깊어지면 꽃을 토하는 병이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꽃을 토하는 병이 있었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누구야, 그 꽃 주인이.
아마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것이다. 아니 대답해준다고 하면 그게 더 싫다. 민트초코 싫다고 짜증부리고 등에 파핑캔디 백 개 박히고 싫어요 소릴 하루 죙일 들어도 그것보단 나을 거다.
"선배, 저 할 말 있어요."
뭐?
에취.
자기도 약 먹고 나온다는 걸 깜빡했다는 게 기억났을 땐…… 이미 한참 늦어 있었다. 서둘러 입을 가리는데 입안에 지긋지긋한 파핑캔디.
에취.
라넌큘러스는 하도 커서 입에 한 송이 이상 물고 있을 수도 없다. 손에 커다란 꽃이 팡 하고 닿는 게 느껴졌다. 따갑다. 그 와중에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누이랑 눈 마주쳤다. 아, 망했어. 에취, 엣취, 에엣취. 꽃은 곧 양손으로 더 받아내기 힘들만큼 쏟아져 나왔다. 선배 한여름에 감기 걸렸냐며 물어보던 누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간 꽃잎 한 장을 붙잡아든다.
"선배도 꽃 토하네요……?"
"이리 줘."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꽃이 손 안에서 흩어져 날린다. 바나나 향도 함께 퍼져 넘실거린다.
집에 오는 길 내내 그렇게 꽃을 토했다. 발걸음마다 꽃 한 송이씩 떨어져 내렸다.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누이는 잘 가란 인사 한 마디도 없었다. 그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다가 이내 집을 향해 방향을 틀어 걸어갔다. 쥰은 거기에 잠깐 멈춰서 누이의 등을 보다가 다시 꽃을 토했다. 그렇게 꽃을 토하며 돌아온 제 방 역시 꽃밭이었다. 쥰은 가방을 내려 놓고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 꽃을 치웠다. 그 와중에도 꽃은 멈추질 않아서 산호색과 연노란색이 섞여 어지러웠다. 꽃을 전부 그러모아 쓰레기봉투에 처넣고 아예 밖에 내다 버렸다. 두 봉지나 나왔다, 그 지긋지긋한 꽃들이. 전부 제 몸에서 자란 것이었다.
간만에 깨끗해진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곤 그대로 침대에 몸을 처박았다. 매트리스에서 스프링이 무겁게 튕기는 소리가 났다. 이대로 자고 싶은데 심란해서 잠도 안 오고 자봤자 개꿈만 꿀 것 같았다. 천장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딱히 치료하려는 시도를 안 해봐서 상기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 꽃을 토하는 병은 짝사랑이 이뤄져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미친 소리지, 짝사랑을 이루는 게 뭔데. 뭐 결혼이라도 해야 하냐. 약은 그저 꽃이 자라는 걸 늦출 뿐 직접적인 효과도 없고 쥰은 하도 먹은 지가 오래돼서 이미 내성이 생긴 지가 한참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꽃 일년 째 토하고 있는데 겨우 오늘 들켰네. 그것도 하필이면 걔가 꽃을 토하는 걸 본 날에. 부질없었다. 일 년을 꽃 토해봤자 어차피 그 꽃 주인이 다른 사람때문에 꽃 토하고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완치는 고사하고 완치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꽃 아니, 이 병은 그렇게나 답없이 모순적이기만 했다.
안 좋아하게 되면 안 토하게 되려나. 하긴 이게 됐으면 일 년이나 토하지 않았겠지.
더는 머리 아파서 고민 못하겠다 싶어 일어났다. 이 시간에 피아노 치면 부모님이 뭐라고 할 테지만 어딘가 정신팔릴 곳이 필요했다. 쥰은 가방을 열고 악보를 꺼내려고 뒤적거렸다. 그런데 뭔가 바스락거리는 봉지같은 것이 손에 잡혀 꺼내보았다. 누이가 정성껏 털어넣었던 꽃이 담긴 그 편의점 봉지였다. 아무데나 던져 놨던 게 가방 안이었다니. 하필이면 가져와도 별 걸 다 가져온다. 아아, 그러고보니 이거 이름이 수국이었네. 물론 기억난 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대충 침대 위에 던져놓고 악보를 꺼내는데, 어디선가 시원한 향이 났다. 악보에서도, 가방 속에서도, ……침대 위에서도? 쥰은 냅다 봉지를 낚아채서 탈탈 수국을 털어냈다. 푸른색, 아직 싱싱한 수국들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진한 민트향.
아이스크림에서 나는 게 아니었어?
꽃을 들고 향을 맡아보니 더 확실했다. 코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시원한 민트향이다. 게다가 묘하게 달콤한 향도 난다. 쥰이 엄청 좋아하는 냄새였다. 순간 어처구니 없는 상상 하나가 떠올랐는데…… 자기 입에서 나는 바나나향 때문에 묘하게 어처구니 없지 않아 보였다.
"……민트초코 싫다며?"
오늘도 1교시 시작 전에 보건실에 들렀다. 보건 선생은 아직이었다. 노란색 약 두 알 먹고, 물 마시고, 그리고 바로 교실로 올라갔다. 수업은 듣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자지도 않았다. 대신 창문 밖만 하릴없이 내다봤다. 날이 좋았다. 물빛 하늘…… 수국색이었다.
약 두 알 가지고는 두 시간도 못 버티는 게 당연했다. 꽃잎이 따가워져서 좋은 게 있다면 목이 조금만 까끌거려도 바로 꽃이 올라오는 걸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감기입니다, 하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교실을 나섰다. 타이밍 좋게 문 닫자마자 꽃 한 송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번엔 버리지 않고 꼭 쥐고 보건실로 향했다. 뭐 어차피 버릴 곳도 없었지만.
노크 두어번 예의상 하고 문 열었더니 얼굴에 옅은 민트향이 훅 끼쳐온다. 보건실엔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보건 선생이고 한 명은…… 누이였다.
"안녕."
"어, 여기 있었냐."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쥰은 보건 선생에게 대충 고개를 까딱하곤 약을 찾아 먹었다. 물 마시는데 또 감기라고 보건 선생이 일지에 적는 게 보였다.
"계속 감기라고 적으면 안 걸립니까?"
"어차피 나밖에 안 봐."
자기도 감기라고 해놓고 왔으면서 괜히 할 말 없어 한 말이었다. 책상 위에는 보건 일지 말고도 방금 핀 듯 싱싱한 수국 한 덩이가 놓여 있었다. 하늘이랑 똑같은 색이다. 물 다 마시고 나선 아예 침대에 드러누웠다. 점심 시간까지 있다가 갈 요량이었다. 아니 사실 점심 시간까지 있을 필요는 없는데 지금은 여기 있어야 했다. 누이는 보건 선생을 흘긋 쳐다보더니 지난 번 앉았던 침대에 다시 앉았다. 절대로 땡땡이 말리는 법이 없는 보건 선생은 태평하기만 했다.
"그쯤 되면 고백하는 게 어떠니?"
"글쎄요."
태평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뜬금없이 정곡을 찌른다.
"꽤 오래 토했는데. 그거,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꽃핵이 커져서 건강에 위험해. 약으로도 한계가 있고."
다른 말은 다 흘려들었고 건강에 위험하다 한 문장 알아들었다. 건강에도 위험한 거였군…….
"게다가 중간에 꽃이 바뀌는 건 처음 보는 걸."
"색이랑 향만 바뀐 거예요."
"안 바뀐 건 아니잖아?"
웬일로 꽤 보건 선생다운 조언을 해준다. 어떻게 하냐고 물어볼 때는 마냥 약올리듯 웃으면서 고백이나 하라고 하더니만. 잔소리가 귀찮아지긴 했는데 지금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알 것 같다. 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그렇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저도 갈게요."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두었더니 누이가 알아서 잘 따라나와 대신 닫았다. 각자 토한 꽃을 들고 복도를 걷는데, 착각인지 뭔지 라넌큘러스의 바나나향 말고 시원한 민트향만 가득 났다.
"야."
"왜요."
"왜요."
"너 그 수국 주인한테 고백할 거야?"
왜요, 짧은 단어 하나 말하는데 날 서있는 건 그렇다치고 입에서 민트향이 엄청 났다. 왜 어제 같이 있을 땐 몰랐나 싶을 정도였다. 그저께 먹던 그 민트초코 향보다 두 배, 아니 제곱은 더 진하다.
"난 하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행복하세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행복하세요."
"원래 안 하려고 했는데 보건 선생 말 들으니 안 하면 죽을까봐 무섭다."
"안 죽어요……."
"어, 고백 할 거니까 안 죽겠지 뭐."
"네, 참 좋으시겠어요."
비꼬듯 말하는데 웃음날 뻔 했다.
"넌 안 좋아?"
"아까부터 못 알아듣게 무슨 소리에요?"
이제 명백히 짜증난 투로 말하며 걸음을 멈춘다. 쥰도 덩달아 멈춰 돌아보았다. 여태까지 본 얼굴 중 가장 구겨져 있다. 이런 순간에는 좀 웃진 못하더라도 얼굴 좀 펴고 있으면 좋겠는데.
"나보고 좋겠다고 했잖아."
"난 고백 안 할거라니까요……."
"그래서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
"뭔 소리야."
"아, 진짜."
"아, 진짜."
"야, 좋아해."
그 말 하는데 왜 제 머리가 핑그르르 한바퀴 도는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말은 또박또박 나왔다.
"너 좋아한다고, 너."
영 못 믿는 표정이길래 증거 제출하는 느낌으로 손에 쥔 라넌큘러스를 내밀었다. 까칠거려서 손바닥 간지러운데 거의 처음으로 이 꽃이 밉지 않았다. 수국 들고 있는 손을 잡아당기니 바나나 향이 민트향이랑 섞여서 그날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다시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네 말이랑, 손이랑, 그 꽃에서 민트초코 향기 나."
"……."
"그거 나지."
정답 아니면 그냥 죽자는 기분으로 던져보았다.
"미워요."
"미워?"
"어. 엄청 미워."
그냥 죽을까.
"근데 좋아."
아, 안 죽어도 되겠다…….
이번엔 입안이나 등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파핑캔디가 터진다. 백 개 아니 만 개 아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고 반짝거리며 꽃이 되어 녹아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