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케이트 교수는 언제나 모두의 화젯거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늙고 지적인 교수 그 자체보다는 그 주위를 둘러싼 사건과 사람들이 그랬다. 그의 출신 학교, 주요 요직을 차지한 후배들과 제자들, 그의 손으로 직접 구성된 능력자 집단 더 호라이즌,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아이들―그 중에서도 요즘 단연 화제인 것은 그의 손자손녀인 맥고윈 남매였다. 총명하고도 다정한 소년인 헨리와, 낯을 가리지만 오빠를 닮아 명랑한 소녀 캐럴. 헨리의 죽음은 그를 아는 누구에게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교수가 헨리 맥고윈의 죽음에 관한 조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하는 문건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저에게는 크나큰 슬픔과 비탄을 안겨준 사건이지만, 제 개인적인 감정이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국민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조사는 즉시 중단되었고, 헨리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그렇지만 헨리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를 바람처럼 떠돌고 떠돌아 작은 폭풍이 되어 있었다.
캐럴라인 맥고윈은 어느새 손끝을 맴돌기 시작한 작은 눈보라를 바닥에 그대로 흘려보냈다. 소금 같은 얼음 결정이 나무로 만들어진 마루에 작은 분수처럼 하얗게 흩어졌다. 캐럴이 만든 눈보라를 시도때도 없이 받아낸 마루바닥은 벌써 몇 번째 새로 공사해 교체된 참이었다. 하녀들은 새 마루를 쓸고 닦으며 아가씨가 능력을 아직도 조절하지 못한다며 수군거렸다. 그날 밤에 캐럴은 온 바닥을 눈으로 새하얗게 덮어버렸다. 아침에 잠을 깨우러 온 하녀는 어안이 벙벙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울 같지?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캐럴이 묻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집사장을 부르겠다며 얼른 걸음을 돌렸다. 결국은 저녁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 소리 들어야 했다. "적당히 하거라." 무얼 적당히 하라는 건지 캐럴은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캐럴은 헨리의 죽음에 관한 조사 중단을 요청하는 문건을 가지고 있었다. 원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서재를 뒤지고 다닐 적에 발견한 것이었는데, 그는 꽤나 고심했는지 문서를 여러 장 고쳐 썼었다. 캐럴은 하나하나 다 읽어 보았다. 하지만 조금 더 공적으로 고친 단어들을 제외하면 내용은 다들 비슷했다. 심지어 뉴스로 대신 들었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캐럴은 그 중 가장 마지막에 쓴 걸로 보이는 것을 몰래 가지고 왔다. 어차피 다시 들춰질 일이 없는 문서들이었다. 제 방 침대에 드러누운 캐럴은 종이를 다시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크나큰 슬픔과 비탄, 캐럴은 이 대목에서 목 울대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 개인적인 감정이, 이어서 가슴께가 내려앉았다. 슬픔은 맞는 단어였다. 사람이 죽는 건 슬픈 일이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눈앞에서 당연히 숨을 쉬고 더해서 말을 하고 웃기까지 하던 사람이 다음 날 시신으로 나타났다면 그게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슬퍼하는게 당연했다. 캐럴이 인정할 수 없는 건 비탄이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비탄하지 않았다. 적어도 캐럴 앞에선 그랬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손자 이름을 되뇌어보지도 않았다. 유품을 정리하며 손을 떨지도 않았다. 손자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그는 분명 슬프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건 조문객과 같은 표정이었다. 캐럴이 헨리의 관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땅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그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올려 캐럴의 눈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아무도 감히 혼자 남은 여동생이 죽은 오빠와 단 둘이 있는 순간을 방해하지 못하던 때였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했고, 헨리의 죽음도 예외는 아니었다.
헨리가 죽은 이후로 자연스럽게 헨리에게 쏠려 있던 사람들의 이목은 남은 여동생에게로 옮아 갔다. 그래서 헨리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관심이 사그라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캐럴이 더 호라이즌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픈 눈빛을 하고 웃어주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더 호라이즌에 들어간 사람이 '헨리의 여동생'이 아닌 '캐럴 맥고윈'이라는 사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재뉴어리마저도 처음엔 그랬다. ……아니, 아무도는 아니었다. 멜빈이 있었으니까. 그만이 캐럴이 호라이즌에 들어갔을 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건 캐럴 자체에게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지극히 멜빈 리히터다운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그 무관심과는 별개로, 캐럴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 너무 어린 애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캐럴은 한 번도 멜빈의 앞에서 굳이 싫은 티를 낸 적은 없었다. 멜빈도 캐럴이 자기를 싫어하는지 아닌지 전혀 관심 없었겠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헨리의 장례식에서 캐럴 바로 다음에 이름이 불린 인물이었다. 그는 헨리의 생전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마음에…….
"아가씨, 또 바닥이……."
한참이나 노크하던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침대 밑에는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캐럴은 한숨을 쉬는 하녀를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문을 넘는 순간 바깥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얼굴에 훅 끼쳤다.
멜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관 별개로 캐럴은 그의 작업실을 제법 드나들었다. 리첼 스트라우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재뉴어리 정도는 되었다. 물건을 고쳐달라는 이유도, 호라이즌 관련 일 때문도 아니었다. 멜빈은 캐럴이 말없이 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가끔 이유를 물어보긴 했지만 특별히 대답을 안 해도 상관 없었다. 가만히 구석에 앉아 있으면 때로는 하도 작동해서 달아오른 기계를 식혀달라며 느릿하게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기계가 차가운 금속의 온도를 되찾을 동안 캐럴은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어두운 작업실 내부를 열심히 눈을 굴려 살펴보았다. 두 개의 제피,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기계, 죄다 열려 있는 공구 상자, 구석에 처박힌 책장과 서랍, 종이들이 잔뜩 널려있는 책상 위, 그 중 뜯지 않은 전보……
캐럴이 작업실에 도착할 때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눈을 찔러서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캐럴은 한 번도 노크를 하거나 벨을 울린 적이 없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낡고 무거운 쇠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자마자 기름 냄새와 잉크 냄새와 금속 냄새가 합쳐져 코를 찔렀다. 노을진 바깥에 비하면 밤이 몇 시간은 더 빨리 와버린 듯 어두운 작업실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현관에 서 있다가 이내 발을 떼었다. 어지러이 널브러진 공구와, 미친듯이 휘갈겨 써내간 수식들로 꽉 찬 종이를 밟지 않고 가는 것쯤은 이제 당연했다. 캐럴은 작업실의 한가운데에 도달해서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멜빈은 대개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거나 기계를 만지고 있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멜빈."
낯간지럽게 이름을 불러보아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멜빈!"
목소리를 더 크게 해봐도 사방은 조용했다. 그 멜빈 리히터가 작업실에 없다면, 어딜 갔으려나. 캐럴은 다시 사방을 살펴 보았다. 멜빈을 찾는 게 아닌, 이곳에 없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때 책상 쪽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노란색 제피가 캐럴의 음성을 인식하고 부팅된 모양이었다. 네모난 화면 안에 빨간색 사선 불이 두 개 들어온다. 캐럴은 그걸 도저히 눈이라고 생각하기 싫었다. 제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캐럴 앞으로 다가왔다. 균열지고 딱딱한 음성이 제피에게서 흘러나왔다.
"음성을 인식합니다, 캐럴라인 맥고윈."
"멜빈은 어디 있어?"
캐럴은 이 기계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에 아직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검색합니다, 멜빈 리히터― 제피 L 사용자 확인. 반경 15m 내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외출한 거야?"
"검색합니다, 외출―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외출이 아니라면 어디 갔어?"
"제피 L 내에서 외출과 유사한 단어가 포함된 영상을 찾았습니다. 작성자, 헨리 맥고윈."
멜빈 리히터는 헨리 맥고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캐럴은 멜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캐럴은 아까와 비슷하게 목 울대와 가슴께가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기계의 음성이 조합해낸 헨리의 이름은 다른 음성과 마찬가지로 균열이 져 있었다. 사실 헨리가 멜빈에게도 무언가 남기고 갔을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헨리는 캐럴에게 자주 편지나 쪽지를 남겼고, 자그마한 선물도 여러 번 전해주곤 했다. 캐럴은 멜빈의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뜯지 않은 전보들을 떠올렸다.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재생… 해줘."
"영상을 재생합니다."
캐럴의 생각은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했었다. 글씨나, 어디서 산 것, 억지나 우연으로라도 찍었을 지 모르는 사진. 캐럴은 헨리가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남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게 헨리가 캐럴에게 남기고 간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편지들, 캐럴이 떠올라 산 작은 목걸이, 어깨를 감싸고 웃으며 찍은 사진.
영상은 편지도 아니었고, 선물도 아니었고, 사진도 아니었다. 영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제피가 영상 로딩을 마치자 붉은 빛이 사라졌다. 캐럴은 덜덜 떨며 화면만 바라보았다. 화면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동안 캐럴의 눈이 거울처럼 비추어졌다. 그리고 일순간,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헨리의 눈.
"이거 되는 건가? 되는 거 맞지, 제피? 좋아, 멜빈. ……어, 인사해야 되나? 아까도 했는데. 안녕, 멜빈. 아하하, 제피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니. 그런데 도저히 너한테 얘기하는 것 같진 않네. 그냥 제피한테 전해달라고 해야겠어. 어디서부터 얘기하지? 그래, 제피. 내가 계속 여행했던 건 알지? 곧 5년 후의 미래로 갈 거야. 아돌프 박사는 가장 큰 힘을 가지게 되는 집단을 찾아내고, 라파엘이라는 사람에게 그 집단이 어떻게 권력을 가지게 되는지 전하라고 하셨어. 나머지 일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할 거라고……. 난 이 일을 끝으로 시간 여행하는 일을 그만 둘 거야. 신경 안 쓰는 척 하지만 네 주인이 날 은근 걱정하거든. 다음에 보자, 옐로우 키드."
영상은 그대로 멈추었다. 헨리는 웃고 있었다. 사진에서의 웃음도 아니었고, 기억 속의 웃음도 아니었다. 그건 진짜 헨리였다. 그 순간에 존재했던, 그 순간에 살아 움직이던 헨리.
캐럴은 도저히 영상을 다시 재생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멈춘 웃음, 그 다음의 영상을 보고 싶었다. 그 다음의 헨리가 보고 싶었다. 다음에 보자. 그 다음이 보고 싶었다. 헨리의 다음. 재생을 끝마치고도 캐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화면의 헨리가 사라지고 붉은 불빛이 다시 들어온다. 그게 끝이었다. 다음이 아닌, 그대로의 끝. 헨리는 캐럴에게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습관처럼 떠난 여행이었고, 습관처럼 돌아올 줄 알았었다. 다음은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캐럴은 제가 썼던 일기를 떠올렸다. "오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약속을 어겼다." 헨리가 약속을 어긴 것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내려앉았던 목 울대가 완전히 부숴진 느낌이었다. 점점 체온은 뜨거워졌지만 반대로 손끝은 아플 정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캐럴은 울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울지 않는다는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약속을 못 지키는 건 지난 여름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캐럴은 틈이 날 때마다 헨리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했다. 캐럴, 하고 부를 때의 목소리, 억양, 표정, 입의 모양을 떠올리려고 애쓴 적이 몇천 번은 되었다. 기억은 캐럴의 머릿속을 바람처럼 떠돌고 떠돌다가 폭풍이 되지 못한 채로 흩어져 버렸다. 캐럴은 헨리가 하는 인사도 떠올릴 수 없었다. 웃는 소리도 떠올릴 수 없었다. 캐럴은 헨리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없었고, 캐럴은 헨리가 웃을 때 눈이 어떻게 접히는지, 입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말할 때 시선을 어떻게 굴리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캐럴은 그랬다.
"……언제 왔어?"
하지만 멜빈 리히터는 다르다.
그는 헨리가 생전에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언제고 다시 되돌려볼 수 있다. 멜빈 리히터는 헨리 맥고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헨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멜빈이었다. 가장 가까운, 캐럴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헨리가 캐럴에게 해주지 않은 말들, 멜빈은 언제든지 다시 듣고 볼 수 있다. 헨리가 유일하게 멜빈과 캐럴에게 똑같이 남긴 것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거짓말.
제피가 멜빈에게 먼저 날아갔다. 캐럴은 제피를 따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멜빈은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당황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하다못해 캐럴이 우는 걸 보고 걱정하는 기색도 당연히 없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똑바로 캐럴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었다. 마치 장례식 때의 할아버지처럼, 캐럴과 헨리가 마지막으로 단 둘이 있을 때 감히 끼어들던 그 시선처럼. 그러나 너무나 명백하게, 이번에 끼어든 것은 캐럴이었다. 그게 캐럴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사실이었다. 들켰다는 얼굴을 한 것은 멜빈이 아니었다. 캐럴이었다.
캐럴은 멜빈이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작업실을 나섰다. 멜빈은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옆엔 제피가 있었다. 헨리의 영상을 수십 수천 수만 번은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제피.
멜빈 시점의 틈새에서 이어지는 걸로 쓴 글
17살의 캐럴 상상하면서 썼지만 나이는 딱히 상관 없다